베트남특수는 1964년부터 1973년에 걸친 한국의 베트남전쟁 참전 기간 중 외화 수익이 창출되어 한국 경제의 성장에 미친 무역 · 비무역 부문의 사회 경제적 효과를 말한다. 한국전쟁 기간 중 발생한 전쟁 특수에 힘입어 경제적 도약을 이룩한 일본에 대한 이해가 높았던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전쟁의 파병과 대 미국 협상을 통해 전쟁 특수 시장에 적극적인 참여를 추진하였고, 이에 따라 증대한 차관의 도입에 힘입어 경제 발전 계획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10여 년간 지속된 제2차 베트남전쟁 기간 중 한국 정부는 베트남전을 둘러싼 국제 관계의 특수한 성격에 편승하여 전쟁 주도국이자 동맹국인 미국을 대상으로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은 1950년대 말 미국이 비무장지대에 배치한 전략 핵의 대북 억지력을 사전에 확보하였기에 베트남전쟁 파병의 대가로 득한 안보 이익은 제한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쟁 특수를 활용한 파병의 경제적 대가는 대미 파병 협상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970년 미국의 제임스 풀브라이트(James Fullbright) 상원의원은 '사이밍톤 청문회'에서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보다는 경제적 이익 때문에 참여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1966년 3월 4일에 합의된 브라운 각서(Brown memorandum)는 한국군 참전 수당을 포함한 여러 형태의 경제적 지원을 약속한 바 있다. 브라운 각서에 적시된 항목 이외의 경제적 이득은 세 차례에 걸친 파병 협상 과정에서 가치가 상승한 한국군의 활용 가치에 대한 미국의 추가적인 보상으로 확보되었다.
한국이 무역과 비무역 부문의 경제적 이득으로 얻어낸 외화는 약 10억 달러에 달하였다. 한편 파병 협상을 통해 확보한 5억 2000만 달러 상당의 미국 공공 차관은 국내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투입되었고, 2억 4000만 달러 상당의 상업 차관은 1970년대 한국 수출 산업의 중심이 된 중화학공업 부문의 설비 투자에 집중적으로 활용되었다.
또한, 미국의 농산물 무상 원조 프로그램을 통해 파병의 대가로 한국에 제공된 약 1억 7000만 달러 상당의 목화는 섬유류 수출을 통한 초기 한국 경제 성장의 기반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파병 기간 중 한국의 대미 수출은 파병 이전인 1964년 3500만 달러에서 한국군 파병이 시작되는 1972년 7억 5900만 달러로, 그리고 대일 수출액은 같은 기간 3800만 달러에서 4억 달러로 증대하였다. 그러나 대일 수입액은 같은 기간 1100만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열 배가량 늘어났다.
한편 베트남에 진출한 민간 기술자와 기업들은 건설, 토목, 항만, 물류 산업의 노하우를 얻었으며, 특히 건설토목 산업은 차후 중동 건설 특수를 누릴 수 있는 역량을 구축하는 기회를 확보하게 되었다.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경제적 영향은 조국 근대화와 시급했던 외환 보유 능력 확충과 차관을 통한 국가 공공시설 투자 자금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대외무역 구조의 왜곡과 특정한 신생 대기업 자본의 등장과 국내 경제 구조의 왜곡이라는 측면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