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정명이 죽은 후, 18세기 말에 만들어진 4매 8면의 지석(誌石)으로, 외손 이득신이 찬하고 강세황이 글을 썼다. 찬자와 서자(書者),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2004년 7월 9일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홍정명(洪廷命, 1692~1748)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사흠(士欽), 호는 겸산(謙山)이다. 선조의 부마인 당원위(唐原尉) 홍우경(洪友敬)의 현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홍기서(洪箕敍), 아버지는 평양부 서윤(平壤府庶尹) 홍린(洪潾),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 감찰(監察) 민회(閔晦)의 따님이다. 부인은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다.
1692년(숙종 18)에 태어나 1715년(숙종 41) 식년 진사에 입격하고, 1725년(영조 원년) 정시 병과에 급제하였다. 1735년(영조 11) 성균관 전적(典籍)을 시작으로 여러 내외직을 거쳐 1745년(영조 21) 장령(掌令)과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후 1748년(영조 24) 사간(司諫)으로 한성의 정동(貞洞) 황화방(皇華坊)에서 57세로 졸하였다. 아들들을 일찍 잃고 홍건(洪楗)을 양자로 들였다.
모두 4매 8면으로 된 이 지석은 1면에 휘자(諱字)와 본관 및 세계, 2~3면은 과거와 관력, 4면은 생졸과 성품 · 치재(致齋), 5면은 세론(世論)과 효우, 6면은 배위(配位), 7면은 자손록과 세평, 8면은 명(銘)과 찬자 · 서자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지석은 홍정명의 외손 백곡(栢谷) 이득신(李得臣, 17421802)이 지문을 찬하고,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글을 썼다.
홍정명이 졸한 1748년(영조 24)이나 부인 전주 최씨와 합장한 1760년(영조 36)보다 늦게 지석을 완성하였다. 제작 시기는 찬자와 서자의 관작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찬자인 이득신의 관직이 홍충도 관찰사(洪忠道觀察使)로 나타나고, 서자인 강세황의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1785년(정조 9)에서 1790년(정조 14)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이득신이 홍충도 관찰사를 역임한 때는 1785년이었고, 강세황이 1783년과 1789년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고 1790년에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득신이 관찰사로 재직할 당시 외조부의 묘지문을 찬하고 이후 강세황이 쓴 것으로, 지석의 제작 시기는 1789년 이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지석은 충청북도 진천 광혜원면 실원리의 남양홍씨 재실 바닥에서 발견되었다. 지석은 오석(烏石)에 해서체(楷書體)로 음각한 4매 8면이다. 크기는 길이 27.828.2㎝, 너비20.320.7㎝, 두께 2.0~3.6㎝로 지석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고조 홍우경의 초상이 2004년 10월 22일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홍우경 · 정인옹주(貞仁翁主) 묘소가 1988년 9월 30일에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지석은 현존 사서나 족보에 비해 개인의 자취에 대한 많은 사실을 전하고 있어 문집이 없는 인물의 전기를 복원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오석으로 제작한 재질의 특징과 서자(書者)가 당대 시서화의 대가였던 표암 강세황이라는 데에 서예사와 금석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