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 20일에 울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고려시대에 지금의 울산 학성동에 자리한 신학성(神鶴城)을 방어하던 장군이었던 박윤웅(朴允雄)은 지방호족 세력 정비에 공을 세워, 유포에 있는 미역바위 12구를 하사받아 미역채취권을 가지게 되었다.
과거에는 자연산 미역의 착생지가 한정되어 있었고 미역 채취장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역을 채취할 수 있는 곽암은 경제적 가치가 매우 컸다. 고려시대에는 왕자나 공을 세운 사람에게 곽암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곽암에서 채취된 미역은 국가에 세액으로 일정액을 납부하였다.
곽암은 미역바위, 양반돌(양반바위), 박윤웅돌(박윤웅바위), 사암(賜巖), 채암(采巖)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박문수(朴文秀, 1691∼1756)는 “위대한 공은 영원히 썩지 않는다.”라는 의미로 바위에 ‘윤웅(允雄)’ 두 글자를 새겼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미역이 생장하는 바위는 곽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미역은 바닷가 연안에서 자라는 해조류로 간조선 부근에서 바위에 걸쳐 생육한다. 수온의 영향을 많이 받아 바닷물의 온도가 지나치게 낮거나 높은 곳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 온도가 17∼20℃에서 발아하고, 생육에 알맞은 온도는 5∼17℃이다.
곽암 주변의 울산 동해안은 쿠로시오해류의 지류인 쓰시마난류 중 한반도 동해안의 사면을 따라 북상하는 동한난류가 통과하는 곳으로 수온이 10℃를 상회하여, 미역이 생육하기 위한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다.
해안은 신생대 제3기에 형성된 화산암질 안산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미역이 바위에 붙어 자생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다. 파도가 세고 조수간만의 차가 적어 미역 자생지로는 최고의 장소로 꼽힌다.
이 일대는 해안단구가 모식적으로 분포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울산단층선 동쪽에 위치하며 비교적 완만한 경사의 산지가 해안으로 돌출해 있다. 곽암이 있는 판지마을의 남쪽에는 해발 75m 내외의 고위면이 확인되는데, 이곳은 밭으로 이용된다.
곽암은 울산박씨 문중 후손이 조선 영조 때까지 소유해 오다가 국가에 환수되었다. 환수 후 3년 내내 미역 흉년이 들어 그 가운데 1구를 박씨 문중에게 돌려주어 일제강점기까지 소유권이 이어졌다. 박씨 문중에서 관리해 오던 것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수산청으로 관할권이 이속되었다가 1961년 이후 개정된 수산업법에 따라 어촌계로 관리권이 넘어 왔다.
이에 울산의 유림과 박씨 문중이 정부에 탄원을 하여 1966년 5월에 다시 박씨 문중으로 반환되었다. 이곳에는 박윤웅에 대한 기록을 새겨 놓은 비석이 설치되어 있지만, 옆에 대형 숙박시설이 자리하고 있어 쉽게 찾을 수 없다. 유형의 국가유산이지만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곽암 미역은 예로부터 임금님께 진상되었으며, 3∼4월에 채취된 미역 맛이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울산지방은 조선시대에 제주도 다음으로 미역 생산량이 많았던 곳이며, 지금도 미역이 채취되고 있다.
곽암은 사람들의 노력이나 삶의 지혜로부터 만들어진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데에서 국가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지금은 울산광역시의 대표적인 향토 경관자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특히 곽암은 조선 후기 미역 생산과 관계가 있는 곳으로 조선 후기의 경제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