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잉여농산물협정(韓美剩餘農産物協定)은 1955년 5월 31일, 미국 공법 480호 1관에 따라 미국 잉여농산물이 공급되고 대한민국 통화로 환산하여 대충자금에 예치한다는 내용의 대한민국과 미국 간의 원조 협정이다. 협정의 결과로 적립된 대충자금은 국방비와 주한 미국기관 운영에 소요되었다. 식량과 국방비 부족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미국 측 재고량에 따라 농산물이 과잉 공급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농산물 자급률은 저하되었다.
광복과 전쟁으로 1950년대 대한민국의 식량 위기가 고조되었으나, 정부의 농업증산계획은 번번이 실패하였다. 사정은 점점 악화하여 1인당 양곡 소비량이 감소하였고, 1949~1952년 사이 쌀값은 폭등하였다. 미국은 다양한 통로로 잉여농산물 구호원조를 실행하였다.
한편, 미국은 1948년부터 만성적인 공급과잉으로 인한 농업 불황이었다. 이러한 사태는 유럽의 복구로 인하여 1949년 말부터 더욱 악화되었다. 미국은 ‘원조를 통한 수출 촉진’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따라서 대한민국과 미국 간 경제원조 성격의 잉여농산물 원조를 확대하기 위한 제도화된 장치가 필요하였다.
한미잉여농산물협정은 1955년 5월 31일, 유완창(兪莞昌) 부흥부 장관과 레이시(William S. B. Lacy) 주한 미국대사 사이에 조인되었다.
미국은 「1954년 농업 교역발전 및 원조법(Agricultural Trade Development and Assistance Act of 1954)」을 제정하여 농산물 원조를 제도화하였다. 이 법은 미국 공법(Public Law) 480호이기 때문에 PL480으로 약칭된다.
PL480은 1관, 2관, 3관으로 구분되었으며, 한미잉여농산물협정은 1관에 근거하였다. PL480 1관은 적립된 대충자금을 미국 농산물의 해외 신시장 개척, 전략물자 구매, 공동개발을 위한 증여, 공동방위를 위한 군사 장비 및 노역 구득(求得), 해외의 미국 부채 변제 등에 사용할 것을 명시하였다.
따라서 전문과 6개 조로 구성된 협정에는 미국의 재고량에 따라 물량이 공급되고, 대금은 대한민국 통화로 환산하여 대충자금 계정에 예치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예치된 자금은 잉여농산물의 시장 개척비, 주한 미국기관 운영비, 대한민국의 국방비에 지출하며 미국이 지출 우선순위를 결정하도록 규정하였다. 도입된 잉여농산물은 미국이 특별히 승인한 경우를 제외하면 가공수출까지 포함하여 타국으로 전송되는 것이 금지되었다.
한미잉여농산물협정에 따라 도입되기 시작한 잉여농산물은 19551971년 사이 총 7758만 189달러 규모에 달하였다. 판매 수입의 1020%는 미국 측에 돌아갔고 나머지는 국방비에 사용되었다. 도입된 농산물은 밀이 40%였고 나머지는 원면, 보리, 쌀 등으로 매년 국내 수요를 초과하였다.
이로 인하여 인플레이션(inflation) 속에서도 농산물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농민들의 생계는 어려워졌다. 미국은 잉여농산물 공급량을 대한민국의 수요가 아니라 자신의 재고량에 따라 결정하였기 때문에 농산물 공급과잉 문제는 점점 악화되었다.
미국에서 도입된 잉여농산물은 당시 부족하였던 식량과 국방비 조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자급하던 면화, 밀은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대한민국 농업의 고질적으로 문제였던 쌀 단작화(單作化)는 더욱 심화되었다. 결과적으로 농산물 자급률은 점차 낮아졌고 저곡가로 인하여 도시와 농촌 간 불균형이 가속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