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조선 전기에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김식의 아들로 사면된 이후 후학 양성에 힘쓴 학자이다. 기묘사화 이후 부친의 망명으로 추국령이 내려지자, 동생 김덕순과 함께 행적을 감추고 지내다가, 1538년(중종 33) 신원(伸寃)된 뒤 집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윤근수(尹根壽, 1537∼1616) 등 많은 명사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1552년(명종 7) 향년 53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부친 김식이 도학에 있어서 조광조와 쌍벽을 이룰 만큼 명성이 높았는데, 그 역시 부친으로부터 도학에 대한 수준 높은 소양을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의
조선 전기에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김식의 아들로 사면된 이후 후학 양성에 힘쓴 학자.
개설
생애
『기묘록보유』에 따르면, 김식의 식솔들에 대한 추포령이 내려져 관군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으나, 그는 여자 옷으로 변복하여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친 김식은 망명 후 관군의 추격을 피해 근 4개월동안 도망을 다녔으나, 일행 중 이신(李信)의 배신으로 그를 도왔던 조력자들이 체포되는 가운데, 지리산으로 향하던 김식은 결국 거창의 산중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부친이 사망한 후에도 그는 관군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나 도피 생활을 계속하였다. 조정에서는 그가 무재(武才)가 있다하여 후에 있을지도 모르는 변고에 대비코자 거듭해서 추포령을 내렸지만, 끝내 체포하지 못하였다. 동생 김덕순 역시 체포되지 않았다.
기묘사화 이후의 정국은 경빈 박씨 사건을 계기로 심정이 사사되고, 심정을 이어 권신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던 김안로(金安老, 1481∼1537)마저 패퇴하면서 기묘인들에 대한 신원(伸寃)이 이루어졌다. 그도 이 무렵인 1538년(중종 33)에 사면(赦免)되었으며, 이후에는 조정에 진출할 생각을 접은 채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문하에서 수학한 명사들이 많은데, 윤근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사면된 뒤에는 20여 년을 학문과 제자 양성에 힘쓰다가, 1552년(명종 7) 향년 53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효종대 재상을 지내며 대동법 시행에 힘썼던 김육(金堉, 1580∼1658)은 그의 증손이다.
활동사항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국조인물고(國祖人物考)』
- 「기묘사화와 기묘사림의 실각」(송웅섭, 『한국학보』119,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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