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화사족 ()

조선시대사
개념
번화한 한양과 그 인근에 거주하는 사족.
정의
번화한 한양과 그 인근에 거주하는 사족.
개설

경화사족(京華士族)은 한양과 근교에 거주하는 사족이라는 일반적 의미 이외에, 특히 18세기 이후 서울[京華]과 지방[鄕村]의 정치·경제·문화적 격차가 심화되는 경향분기(京鄕分岐)의 흐름에서 서울을 높이고 지방을 낮추던 풍조 속에 번화한 서울의 사족을 특별히 지칭하기 위하여 고안된 역사 용어이다.

내용

‘번화한 서울’이라는 의미의 경화(京華)라는 표현은 18세기 이후의 사료에 빈번히 등장하는데, 여기에 사족과 사대부를 결합하여 촌스러운 지방 사족과 구별하고자 한 것이다.

본래 조선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집권 국가이기 때문에 서울과 지방의 위상 차이는 분명했다. 그러나 15세기는 국가의 초창기로서 다양한 지방 세력이 대거 중앙에 포진하였던 때이고, 16세기는 지방의 사림이 꾸준히 중앙에 진출하며 결국 정권을 잡았던 때였기에 서울에는 지방 출신 가문의 비중이 높아서 그 차이가 크게 의식되지는 않았다. 인조반정이 발생한 17세기까지도 호서 혹은 영남 출신의 산림(山林)이 특별한 대우를 받는 등 중앙과 지방 사림의 교유는 활발히 유지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매우 뚜렷하게 인식되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이래 다양한 설명이 제시되었으나, 정치·경제·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정치적으로는, 서울·경기에 거주하는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 세력이 꾸준히 조선 후기 정치를 주도하여 세가(世家)·벌열(閥閱)을 이루었고 이들은 왕실과 국혼을 놓치지 않으며 권력의 핵심부와 결속되었다. 여기에 조선 후기 농업 생산력 증대와 대동법의 시행 등으로 유통 경제가 발달하여 도시 상업이 진전됨에 따라 경제의 중앙 집중도 강화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 중국과 일본의 교역 단절로 조선을 경유하는 중개 무역도 활발해져 서울·경기와 여타 지역의 격차도 점점 커졌다.

그 결과는 정치 세력의 재편으로도 나타났다. 18세기에는 당쟁의 격화로 남인과 연계된 영남의 사림이 탈락하고, 그 후 경기 지역의 노론·소론 사대부 가문 위주의 탕평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근기 남인이 일부 등용되는 정도였다. 인재 등용이 서울과 그 주변으로 한정되는 추세가 형성되었다. 노론은 서울의 낙론(洛論)이 충청의 호론(湖論)에 비해 우세를 보였고, 소론은 본래 서울의 명문가들이 많았으며, 남인 역시 영남과 구별되는 경남(京南)이 주도하였다. 당색을 불문하고 경화의 사족이 정치와 사회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19세기 이후 탕평이 파탄 나고 한양의 북촌(北村) 인근을 기반으로 하는 노론 세도 가문들의 정치가 고착되자, 경향 분기는 더욱 분명해졌다.

경화사족은 사대부 일반의 정체성을 지니면서도, 지연(地緣)·학연(學緣)에 따라 서울 인근에서 혼맥을 구축하여 탕평(蕩平)과 세도(勢道) 정국을 좌우하는 벌열가·세도가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이들은 후기로 갈수록 서울에 집중되는 권력을 과점하고 지방을 배제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에 정치·사회 세력의 건전한 순환을 저해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은 빈번한 사행(使行) 참여와 풍족한 경제력을 매개로 청나라와 일본·서양 등을 원천으로 하는 외부 세계의 최신 정보를 신속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논의를 주도할 수도 있었다.

조선 후기의 경화 학계는 그동안 지방 사림이 주도했던 주자 성리학에 국한되지 않고, 학맥과 당색, 그리고 신분을 뛰어넘는 교유 양상을 보이며 최신의 학술과 문화를 수용하여 북학(北學)·고증학(考證學)·서학(西學) 등 새로운 사조를 선도하였다. 경화사족이 주도한 이러한 사조를 영·정조대의 ‘진경 문화(眞景文化)’라고 한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實學者)들을 비롯하여 새로운 학풍과 문풍을 주도한 이들은 대부분 경화사족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화사족이 새로운 시대를 담당할 세력이 되기에는 그 한계도 분명했다. 경화사족은 새로운 정치세력을 구축하거나 사회적 위상에 걸맞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창출하지 못하였다. 단지 최첨단의 골동 취미로 상징되는 귀족적 취향에 그치거나, 외래의 통속 문화를 비판 없이 수용하는 속태(俗態)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당대의 현실을 외면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경화사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당대의 기준에서 새롭고 화려하기는 하지만, 경화(京華)를 넘어선 새로운 이념을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를 상징한다고 하겠다.

의의와 평가

경화사족이라는 개념은 조선 후기 서울과 인근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 문화의 선진성과 역동성을 밝히는 데 기여하였으나, 경(京)과 화(華)라는 개념으로 새로운 시대의 이념을 담아내기에는 여러모로 한계가 있다.

참고문헌

『진경시대』1·2(최완수 외, 돌베개, 1998)
『조선후기 경학사상 연구』(김문식, 일조각, 1996)
『연암일파 북학사상 연구』(유봉학, 일지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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