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문창모는 일제강점기 때,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여 결핵퇴치운동을 전개한 의료인·개신교인·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해방 이후 서울 세브란스병원 원장, 대한결핵협회 사무총장,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07년 평안북도 선천군 출생으로, 6·10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옥고를 치렀다. 일제말 친일노선을 취하던 혁신교단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해주 구세병원 의사로 재직 중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해 결핵퇴치운동을 벌였다. 1992년 14대 국회의원에 당시 최고령(86)으로 당선되었다. 2002년 별세하였으며, 같은 해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여 결핵퇴치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이후 서울 세브란스병원 원장, 대한결핵협회 사무총장,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의료인·개신교인·정치인·독립운동가.
생애 및 활동사항
8·15해방 직후 해주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겸 해주시장으로 잠시 활동하다가 공산주의자들의 체포를 피해 월남했고, 1946년 경기도립 인천병원 원장과 1947년 마산 국립결핵요양소 소장을 거쳐 1949년 서울 세브란스병원 원장이 되었다. 1949년 크리스마스실을 재발행 하였고, 6·25전쟁 때 세브란스병원의 거제도 이전과 함께 경상북도 청도와 강원도 원주에 피난민 진료소를 개설했다. 1952년 수복 후 파괴된 남대문 병원 시설을 복구하였고, 1953년 대한결핵협회를 창설, 초대 사무총장직을 맡았다. 1954년 세브란스병원장직을 사임하고 미국에 유학, 인디애나폴리스 감리교병원 레지던트 과정을 수료한 후 귀국하여 1957년 국제대학 초대 학장, 1959년 원주 기독병원 초대 원장으로 봉직하였다. 1964년 원주 학성동에 문이비인후과를 개업, 2001년 3월 의사가운을 벗기까지 43년간 진료활동을 펼쳤다.
독실한 기독교(감리교) 신자로서 31세 때(1938년)부터 감리교 연회와 총회에 평신도 대표로 참석하였는데, 일제 말기에는 친일노선을 취하던 혁신교단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해방 후에는 서울 동대문교회와 원주 제일교회 장로로 봉직하면서 감리회본부 사회국위원장으로 여주 여광원을 비롯하여 40여 개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 지원하였다. 기독의사회와 의료선교회를 창설하였으며, 인천기독병원, 인천간호보건전문대학, 안산전문대학 이사장을 역임했다. 정치활동으로는 제4대(1958년), 제6대(1963년) 국회의원 선거에 후보로 나섰다가 낙선하였고, 14대(1992년) 국회의원 선거 때 정주영 회장의 추천으로 통일국민당 전국구 1번 후보로 당선되어 당시 최고령(86세) 국회의원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2002년 별세하였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한국감리교 인물사전』(역사위원회 엮음, 기독교대한감리회, 2002)
- 『내 잔이 넘치나이다』(문창모, 강원일보사, 1999)
- 『문창모 자서전: 천리마 꼬리에 붙은 쉬파리』(문창모, 삶과 꿈,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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