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동궁이라고 불리던 왕세자가 경서(經書)를 공부하던 건물로, ‘성정’이라는 이름은『대학(大學)』의 ‘성의(誠意)’, ‘정심(正心)’에서 앞 글자를 따서 붙였다. 숙종의「경계세자십잠급소서(警戒世子十箴及小序)」, 순조의「성정각명(誠正閣銘)」등이 남아 있다.
희정당의 동남쪽에 자리하였는데, 왕세자가 하루에 3번 조강(朝講), 주강(晝講), 석강(夕講)의 서연(書筵, 冑筵)을 받았던 곳이다.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705년(숙종 31)에 왕세자가 이곳에 있다가 뜰에 내려와 비답(批答)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전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세자의 공간이었지만, 국왕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곧 1782년(정조 6)에 동궁전인 중희당(重熙堂)이 건립되면서, 이 건물은 초계문신의 시험을 치르거나 대신을 만나는 곳으로 활용되어 희정당(熙政堂)과 함께 편전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내의원(內醫院)을 전의사(典醫司)로 개편한 뒤, 내의원에 있던 현판, 의약 도구 등을 옮겨와 내의원 물품 창고로 사용하였다.
앞면 6칸, 옆면 2칸으로, 익공계 팔작지붕의 형식이다. 서쪽부터 마루 2칸, 방 2칸을 두었고, 동쪽에는 남북 3칸의 누마루를 설치하였다. 누마루에는 희우루(喜雨樓), 보춘정(報春亭)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는데, 희우루는 1777년(정조 1)에 성정각의 누각을 고쳐 지으면서 붙인 이름이다.「동궐도(東闕圖)」에는 희우루 아래층에 벽을 설치한 모습이 보이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는 상태이다. 주변에는 영현문(迎賢門), 인현문(引賢門), 대현문(待賢門), 친현문(親賢門) 등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중희당 영역이 가깝다.
이 건물은 창덕궁의 동궁이었지만, 편전과 내의원 등으로 기능이 바뀌어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에 궁궐 공간을 운영하였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