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의 둘째 딸인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1832)와 부마인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 18191853)의 재사(齋舍)이다. 복온공주는 순조와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병주는 본관이 안동이고, 자는 정구(定九)이며, 시호는 효정공(孝定公)이다. 1830년(순조 30)에 부마가 되어 창녕위에 봉해졌다. 복온공주가 가례 이후 2년도 채 안되어 세상을 떠났는데, 자식이 없자 족형인 김병교(金炳喬)의 아들인 김도균(金道均)을 후사로 삼았다. 하지만 역시 자식이 없어서 제사는 손자로 승중(承重)한 김석진(金奭鎭, 1843~1910)에 의해서 행해졌다.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官)을 지냈는데, 1907년(고종 44)에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뒤, 이곳으로 들어와 거주하였다. 그 뒤 1910년에 일제가 주는 남작 작위를 거절하고는 이곳에서 순국자결하였다.
1832년에 복온공주가 세상을 떠난 뒤 무덤이 주변에 자리하였고, 이어서 김병주의 무덤도 위치하면서 재사가 건립되었다. 그 뒤 무덤은 용인으로 이장되었다. 김병주의 재사로 건립된 부분을 안채로 삼았고, 사랑채는 다른 곳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전한다. 6 · 25전쟁으로 재사와 행랑이 파괴되었지만, 1955년에 다시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재실인 안채, 별채인 사랑채, 대문간채 등이 남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ㄱ’자형 구조인데, 5개의 도리로 지붕 가구를 구성한 모습이다. 안채 부엌 남쪽의 대청마루는 이전에 재실로 사용된 공간으로, 김석진, 김영한(金甯漢), 김윤동, 김문현 등 4대조의 신위를 봉안하였다. 지금의 모습은 원래의 모습과 매우 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선 말기에 건립된 궁집의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