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은 나지막한 산 자락을 등지고 서남향으로 자리하였는데, 광산김씨 담안공파인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 15201588)가 말년에 살면서, 가야서당(佳野書堂)을 열어 많은 제자를 길렀다. 집의 이름은 김언기의 4세손 김세환(金世煥, 16401703)의 호인 긍구당을 따서 붙였는데, ‘긍구(肯構)’는『서경(書經)』대고(大誥)편의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훌륭한 업적을 소홀히 하지 말고 길이길이 이어 받으라’는 뜻을 담았다.
원래는 김언기의 둘째 부인인 영천이씨(永川李氏)의 참봉공(參奉公) 집으로, 김언기는 30대 후반에 처가로 들어가 산 뒤, 46세 때 장인에게서 물려받았다. 그 뒤 둘째 아들인 김득숙(金得肅, 1561~1649)에게 상속되어, 현재는 그 후손이 살고 있다. 처음에는 99칸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컸지만, 지금은 축소된 상태이다. 1940년대에 이어 2001년에도 안채와 사랑채 등을 보수하였다.
고택은 정침(正寢), 사당, 방앗간, 외양간, 화장실 2채로 이루어져 있다. 정침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사당과 사랑채 화장실이 있고, 서쪽 앞면에는 외양간이 위치하였으며, 서쪽 뒷면에는 방앗간과 안채 화장실이 있다. 정침은 앞면 6칸, 옆면 5칸으로, 가운데에 안마당이 있는 ‘ㅁ’자형 구조이다. 앞면의 중문간(中門間)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문간채가 있고, 동쪽에는 사랑채가 있으며, 북쪽 뒷면에 안채가 있다.
안채는 겹집으로 구성되었는데, 안대청의 서쪽에는 앞뒤로 2칸통(二間通)의 안방과 뒷방이 있고, 그 옆으로 2칸의 부엌간이 배치되었다. 부엌의 왼쪽은 반칸 규모의 퇴를 내어 널빤지를 놓은 빈지벽으로 마감하였다. 대청의 동쪽에는 뒷방과 윗방이 있으며, 윗방의 남쪽에는 협문간(夾門間)이 있고, 사랑채에 딸린 책방간이 연이어 붙어 있는데, 협문간에는 윗방의 아궁이가 놓여 있다. 건물은 자연석 받침돌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서 그 위에 네모 기둥을 세워 지붕의 무게를 받도록 하였다. 기둥의 윗부분은 민도리 5량(樑) 가구로 짜여 있고, 홑처마의 수키와 끝부분은 와구토(瓦口土)로 마감되었다. 대청과 기타 창문은 모두 띠살문인데, 창문의 문선은 고식(古式)에 따라 비스듬히 잘라 맞추는 연귀맞춤으로 정리되었다. 벽면과 함께 서까래 위에 흙을 바른 앙토(仰土)는 고운 진흙을 덧바른 재사벽(再沙璧)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앞면에 툇마루를 두고 가운데쯤부터 2칸통의 사랑방과 1칸의 마루를 배치하였다. 특히 마루 바로 뒤에는 1칸의 책방을 두어 학문을 중시하는 반가(班家)의 면모를 갖추려고 하였다. 사랑채의 마루 윗부분에는 ‘긍구당(肯構堂)’과 ‘오매당(五梅堂)’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문간채는 앞면에 각 1칸의 마루와 문간방을 두었고, 마루 바로 뒤에는 1칸의 고방(庫房)이 있다.
사당은 정남향으로 자리하였는데, 동서남북 4면에 기와를 올린 토석(土石) 담장을 둘러 앞면 중앙에 세운 사주문(四柱門)을 통해서만 출입하도록 하였다. 평면은 앞면 3칸, 옆면 1칸 반으로, 흙바닥 구조의 전퇴(前退)를 두었다. 자연석으로 쌓은 받침돌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서 네모 기둥을 세워 지붕의 무게를 받치도록 하였다. 기둥의 윗부분은 도리나 장여 밑에 소로를 받친 소로수장 구조로 장식되었다. 가구는 5량(樑)이고, 홑처마의 맞배지붕을 올렸는데,처마의 수키와 끝부분은 와구토로 정리되었다. 지붕 좌우 옆면의 박공에는 비바람이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풍판(風板)을 달아 놓았다. 앞면의 가운데에는 여닫이문 2짝을 달았고, 좌우에는 외여닫이문을 달았으며, 좌우 옆면에는 자그마한 창문을 냈다. 건물 안에는 감실(龕室)을 두고 4대의 신주를 봉안하고 있다.
이 고택은 비교적 옛 양식이 잘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전통가옥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로 다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