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석문종택 ( )

주생활
유적
국가유산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에 있는 조선후기 성균관 진사 출신인 석문 정영방 관련 주택.
시도문화유산
지정 명칭
예천 석문종택(醴泉 石門宗宅)
분류
유적건조물/주거생활/주거건축/가옥
지정기관
경상북도
종목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2005년 09월 20일 지정)
소재지
경상북도 예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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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에 있는 조선후기 성균관 진사 출신인 석문 정영방 관련 주택.
역사적 변천

1609년(광해군 1)에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이 건립하였다. 정영방은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인 경상도 용궁현 포내리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아버지 정식(鄭湜)이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사촌 형제인 정조(鄭澡)의 양자가 되어 안동의 송천에서 살았다. 그 뒤 1605년(선조 3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산림에 묻혀 처사로 살았다. 1636년(인조 14)에 용궁현의 가산(家産)은 맏아들인 정혼에게 맡기고 영양의 입암(立巖)으로 옮겨 서석지(瑞石池), 경정(敬亭), 주일재(主一齋), 운서헌(雲棲軒), 유종정(遺種亭) 등을 짓고서 이시명(李時明, 1590∼1674), 조전(趙佺), 조임(趙任, 1573∼1644) 등과 교유하였다. 이 건물은 크고 작은 보수를 거쳤으며, 2010년∼2012년에는 서까래 등이 해체 보수되었다.

내용

건물은 완만한 경사면에 서남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초가 지붕을 올린 一자형 대문채와 기와 지붕을 둔 ㄷ자형 정침이 튼ㅁ자형으로 배치되었다. 특히 정침은 기와를 올린 토석(土石) 담장으로 둘러싸였는데, 대문채와의 사이에 있는 사주문(四柱門)을 통해 출입하게 하였다. 이 사주문은 바깥마당과 안마당을 나누는 기준인데, 사랑채는 동쪽에 사랑마당을 두고서 바깥마당 쪽 담장에 일각문(一角門)을 세워 오가게하였다.

안채는 가운데의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안방이 나란히 있고, 안방과 직각으로는 부엌, 광이 배치되었다. 사랑채 역시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에 1칸 규모의 온돌방과 마루가 나란히 있고, 그것의 직각으로 온돌방 3칸이 자리하고 있다. 사랑방은 사랑마당 쪽에 툇마루를 놓아 쉽게 접근하도록 하였다.

정침은 자연석으로 쌓은 받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서 네모기둥을 세운 구조이다. 기둥 윗부분은 민도리 구조로 짜였으며, 가구는 5량(樑)구조이다. 지붕은 홑처마의 팔작지붕인데, 처마의 수키와 끝부분은 와구토(瓦口土)로 마감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종택은 건물의 배치와 평면의 구성이 19세기 후반 이후의 살림집에서 볼 수 있는 것이어서, 한옥의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다루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예천군』(예천군,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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