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설화 ( )

구비문학
작품
태봉국(泰封國)을 건국했던 궁예(弓裔)에 관한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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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궁예 설화」는 태봉국(泰封國)을 건국했던 궁예(弓裔)에 관한 설화이다. 궁예의 신이한 탄생과 유년 시절의 기아와 고난, 태봉국의 건국 과정 및 몰락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웅 일대기 서사 구조의 전형과 몰락한 폭군의 이야기로 이뤄진 특징이 있고, 문헌 전승과 구비 전승이 상호 영향을 준 이야기이면서 고구려 건국신화(建國神話)의 후대적 변이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된다.

목차
정의
태봉국(泰封國)을 건국했던 궁예(弓裔)에 관한 설화.
내용

궁예(弓裔)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고려사』 등 문헌 속에 풍성하게 남아 있다. 이 기록들에서 궁예의 행적을 종합하면, 재래의 탁월한 인물의 일생에 맞추어 설화적 구성을 해 놓은 흔적이 발견된다. 그의 일대기는 고귀한 혈통-기아의 고난-비범한 면모-축출-위기 탈출-영웅적 위업 달성 등으로 요약되어, 일반적인 영웅의 일생과 유사하다. 고귀한 혈통으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신라 47대 헌안왕 또는 48대 경문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애 흔적이 분명하지 않아 고귀한 혈통의 정통성에 흔들림이 있고, 또 어머니가 왕의 첩이며 외가에서 출생하였다는 대립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다.

궁예의 출생에는 비범한 면모가 두드러진다. 흰 빛이 무지개처럼 하늘에 뻗었고, 중오일(重午日)에 태어났으며, 날 때부터 치아가 모두 나 있었다고 한다. 외가에서 태어난 불리함을 벗어나서 장차 위대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시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예는 집안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으며, 부왕을 죽인다고 하는 불길한 신탁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위기에 처한다. 강보에 싸인 궁예를 누각 아래로 떨어뜨린 흔적도 발견된다. 하지만 여종의 손에 길러져서 양길이라는 인물을 죽이고 마침내 왕이 되었다고 한다.

전반부는 전형적인 영웅의 일대기 서사와 일치하는데 후반부는 궁예의 몰락과 비참한 죽음으로 구성되어 있어 영웅성과 신성성이 제거된 형태로 그려진다.

궁예는 태봉(泰封)을 건국하고 난 후 철원(鐵圓)에서 송도(松都), 다시 철원으로 천도하고 스스로를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한다. 그 과정에서 신라 왕상의 벽화를 칼로 베고 부인과 아들을 죽이는 등 폭군의 전형을 보여주고, 왕건(王建)이 왕으로 추대되면서 궁예는 백성에 의해 타살된다. 이렇게 왕건이 등장하면서 궁예의 비인간적 면모가 부각되는데 이는 고려 건국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분석되기도 한다.

구전되고 있는 「궁예 설화」는 궁예가 태봉의 수도로 삼았던 철원과 그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된다. 역사적 기록이나 「궁예전」과는 다른 시각에서 태봉국(泰封國)의 건국 과정, 궁예의 멸망 과정, 궁예의 죽음과 관련된 전설적 요소가 나타나며 민중의 인정 내지 연민의 시선이 담겨 있다. 특히 궁예의 행적이 이 지역의 지명전설(地名傳說)로 남아 있는데, 가령, 태봉국 도성지인 궁예도성터와 궁예가 처음 철원 땅에 들어와 잠시 머물렀다는 천황지, 궁예가 왕건 세력과 전쟁을 벌일 때 태봉 군사들의 식량을 저장했다는 골짜기 군량곡 등이 그러하다. 또한 구전 자료에서는 풍수지리와 관련하여 철원이 삼백 년 도읍터의 운을 타고난 곳으로 그려져 있는데 궁예의 결점과 왕건 세력의 농간으로 삼십 년 도읍지로 전락하였다는 내용이 전승되면서, 자긍심과 아쉬움 등 철원 지역 전승 집단의 정서와 욕구를 짐작하게 한다.

의의와 평가

「궁예 설화」는 두 가지 상이한 전승이 하나로 합쳐져서 기이한 인물의 전설적인 면모를 구현하고 있다. 하나는 영웅의 전설 형식으로, 이른바 전설의 근원인 현자적 면모를 통해 영웅을 찬양하는 서사시적 구성을 충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와 달리 종교적인 성자의 내용을 전설적 면모와 아울러서 구현하려고 했다. 두 가지 상이한 전설의 내용이 한 인물에 구현되는 과정에서 영웅의 비극적 최후와 함께 자신의 위업을 궤멸시킨다. 이 점에서 「궁예 설화」는 매우 복합적인 시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궁예 설화」는 문헌 전승과 구비 전승이 상호 영향을 준 이야기이면서, 고구려 건국 신화의 후대적 변이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 작품이다. 문헌 자료인 「궁예전」이 신화가 전설이 되는 중간 단계 형태를 보여준다면, 구비 전승 자료들은 신화적 요소가 사라지고 역사성을 담은 인물전설(人物傳說)과 흥미로운 민담적 요소가 부각된 변이 형태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유사』 「궁예열전」
『고려사』 「태조세가」

단행본

조동일, 『민중영웅 이야기』(문예출판사, 1992)

논문

박상란, 「지명전설에 나타난 궁예상의 의미」(『구비문학연구』 22, 2006)
이영수, 「‘궁예설화’의 전승양상에 관한 연구」(『한국민속학』 43, 2006)
조현설, 「궁예이야기의 전승양상과 의미」(『구비문학연구』 2, 1995)
최웅, 「역사 기록과 구전 설화로 본 궁예」(『인문과학연구』 27, 2010)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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