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주는 전쟁에 사용한 전투장비 가운데 하나로, 신체를 보호하는 갑옷(甲)과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투구(冑)이다. 동서양에서 비슷한 발전과정을 거치면서 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선사시대 이래 신체를 보호하기 위하여 가죽으로 만든 갑옷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개 가죽으로 제작된 갑주류는 대부분 부식되어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다만 철제의 갑옷과 투구는 심하게 녹이 쓴 상태이지만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채 발견되기도 한다.
갑옷과 투구는 가죽으로 제작한 경우가 많았는데, 가죽으로 형태를 만들고 여러 차례에 걸쳐 옻칠을 더하여 방호력을 증대시켰다. 4세기경부터 가죽보다 방호력이 우수한 철을 소재로 한 갑옷과 투구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대개 고대의 갑주라고 하면 삼국시대의 철제 갑옷과 투구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갑옷의 흔적은 중부지방의 생활유적에서 확인된 철제 미늘조각과 창원다호리유적에서 발견된 가죽제 소찰편, 그리고 평양의 석암리 219호에서 출토된 가죽 갑옷 등이 있다. 이것들은 주로 원삼국시대에 해당하는 것들인데, 아마도 중국에서 제작된 것이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원삼국시대를 지나 삼국시대가 되면 고구려는 벽화고분에 묘사되어 있듯이 찰갑을 착용한 기마군단을 운영하였다. 백제도 고구려와 유사한 형태의 갑옷과 투구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신라와 가야는 찰갑과 함께 독특한 형태의 갑옷인 판갑을 제작하여 공격용 무기에 대항하였다. 신라와 가야지역에서 발견된 판갑은 몸통부분의 지판이 세로로 길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종장판갑(縱長板甲)이라고 부른다. 종장판갑은 우리나라 특히 영남지방에서만 확인되는 갑옷으로 4~5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대갑주는 찰갑과 판갑으로 구별된다. 찰갑은 중국대륙에서 일찍부터 사용하였는데, 고구려는 이를 수용하여 전력화하였다. 당시 대등한 수준으로 고구려와 대항하던 백제도 찰갑을 주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다만 고구려와 백제의 찰갑은 철로 만든 것도 있지만 가죽으로 만든 제품도 많았다. 찰갑은 고구려를 시작으로 하여 3세기경부터 제작하기 시작하였고, 영남지방에는 4세기경부터 채용되었다. 즉 3세기부터 6세기경까지 찰갑이 널리 사용되었다. 주로 가죽으로 만든 찰갑과 함께 철제의 찰갑도 공존하였다.
한편 신라와 가야에도 찰갑이 전래되었지만, 영남지방의 독특한 갑옷인 종장판갑이 유행하였다. 종장판갑은 찰갑의 제작공정을 단순화한 것으로 4세기경의 대형 무덤에서 많은 양이 출토되었다. 하지만 5세기경부터 영남지방에서도 찰갑이 지배층의 갑옷으로 자리잡으면서 종장판갑은 중소형의 무덤에 부장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갑옷과 함께 투구도 철을 소재로 하여 제작되었다. 고대의 투구는 가느다란 철판을 세로로 연결한 종장판투구가 많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투구의 맨위에는 반구형(半球形)의 뚜껑을 덮은 경우가 많다. 고구려고분벽화에도 이와 같은 모양의 투구가 그려져 있는데 영남지방에서도 이러한 종장판투구가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발견된다. 그리고 5세기경부터는 이와 다른 독특한 모양의 투구들도 만들어진다.
찰갑은 양당식(裲襠式)과 동환식(胴丸式)으로 나누어진다. 갑옷을 구성하는 미늘을 가죽끈으로 연결한 것은 동일하지만 양당식은 지금의 조끼와 같은 모양으로 옷섶이 겨드랑이 아래에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대륙의 고대 찰갑은 양당식이 많다. 동환식은 옷섶이 정면에 위치하게 만들어진 갑옷인데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의 찰갑은 대부분 동환식으로 제작되었다.
가죽으로 제작한 찰갑은 옻칠을 하여 방호력을 강화하였고, 철제의 찰갑과 함께 사용되었다. 찰갑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지만, 기본적으로 몸통은 7단, 허리부분 1단, 그리고 허리아래로 4단 가량으로 구성된다. 부속구로서 어깨부분, 다리부분, 목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소찰들이 결합된다. 경주의 쪽샘지구 C-10호 무덤에서 상태가 양호한 신라의 찰갑이 출토되었다. 말을 보호하기 위한 말갑옷도 같이 발견되었는데, 삼국시대 기마무사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찰갑은 조그만한 소찰들을 가죽끈으로 연결한 것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복원하기 힘들다. 따라서 경주의 쪽샘지구에서 확인된 철제 갑옷은 찰갑의 복원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한편 찰갑과 함께 삼국시대의 갑옷으로 널리 알려진 종장판갑은 신라와 가야지역에서 주로 출토된다. 그래서 가장 토착적인 우리나라 고대의 갑옷이라고 할 수 있다. 몸통부분은 세로로 길게 재단한 철판을 횡으로 결합하였다. 그리고 상하단에는 가로방향으로 철판을 덧대어 가장자리를 마무리하였다. 철판을 결합하는 방법은 가죽끈 보다는 쇠못(리벳)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어깨상단부에 목의 좌우를 가리는 철판[側頸板]을 부착하여 목부분을 보호하였다. 측경판에는 오리모양이나 고사리문 등을 장식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측경판의 가장자리에는 동물의 깃털을 꽂아 장식적인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종장판갑은 4세기경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5세기경에는 찰갑이 지배층의 갑옷으로 사용되면서 점차 제작이 중단되었다.
판갑 가운데 종장판갑과는 달리 가로방향의 철판사이에 사각형이나 삼각형의 철판을 채워서 만든 갑옷과 투구[帶金式甲冑]가 있다. 이러한 형태의 갑주는 5세기경부터 왜(倭)에서 주로 사용한 것인데, 우리나라의 영남지방과 서남해안의 섬이나 해안지역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선사이래 왜는 가야와 백제를 통하여 대륙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다. 백제와 가야지역에서 확인되는 대금식갑주는 왜가 우리나라에서 선진문물을 수입하기 위한 활동과정에서 전래한 것이다.
고대의 갑주는 철기제작과정에서 최고기술이 적용된 유물이다. 그러므로 고대갑주의 연구를 통하여 삼국시대 철기제작기술의 선진성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대갑주는 당시의 군사력의 발달과 주변지역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3세기 이후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갑옷과 투구는 중국대륙의 영향을 받았다. 고구려벽화고분과 실물자료 등을 볼 때 질과 양에서도 중국대륙에 뒤지지 않는 수준에 도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라와 가야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특유의 갑옷(종장판갑)을 고안하여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