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수당리 유적 ( )

선사문화
유적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와 돌널무덤 · 독무덤 관련 복합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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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와 돌널무덤 · 독무덤 관련 복합유적.
내용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와 충청남도역사문화원에 의해 두 차례 발굴되었다. 그 결과, 청동기시대 주거지 6기·수혈유구 1기·석관묘 1기, 삼국시대 석곽묘 12기·석실분 2기·옹관묘 2기·토광묘 1기, 통일신라시대 석곽묘 1기, 시대미상의 구상유구와 수혈유구 1기, 토광묘 4기 등 총 32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크게 평명형태가 장방형, 원형, 말각방형 주거지로 구분된다. 장방형 주거지인 3호 주거지를 제외하고는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았다. 출토된 토기 중 4열 횡침선과 점열문이 시문된 적색마연토기가 가락동유형에서 출토된 토기들과 유사하며 위석식노지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전기로 판단된다. 특히 3호 주거지에서 총 120점의 어망추가 세 곳에서 집중 출토된 점으로 보아 3개의 그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청동기주거지내에서 이처럼 다양한 어망추가 출토된 예가 없어 내륙지방의 어로활동을 복원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백제시대 석곽묘와 석실분은 총 14기가 조사되었다. 석곽묘 중 구조를 알 수 있는 것은 6기이며, 모두 수혈식이다. 석실분은 2기가 조사되었으며 잔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2호 석실분의 경우 횡혈식 구조를 하고 있다.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석곽묘의 경우 5세기 전반의 늦은 단계에서 5세기 후반까지 축조된 것이다. 석실분의 경우 석곽묘의 축조시점보다 조금 늦은 단계인 5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6세기 전반을 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 석곽묘는 1기가 조사되었다. 횡구식 석곽묘로 바닥을 2차에 걸쳐 부석한 것으로 보아 추가장이 있었을 것이다.

의의와 평가

금산수당리유적은 여러 시기에 걸친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어 청동기시대 무문토기문화의 이해는 물론이고 한성시기 백제의 영역확장 과정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금강유역 등 중서부지역 주거지에서 출토된 것으로는 처음인 절상돌대(節狀突帶)를 가진 토기의 존재는 청동기시대 가락동유형 무문토기문화에 해당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한강유역 이남지역의 무문토기문화의 전개과정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점토대토기를 부장한 위석토광묘의 확인 역시 그 무렵 요녕지역으로부터 파급된 것으로 이해되는 새로운 묘제의 파급 및 수용과정을 이해하는 데 자료적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금산 수당리유적 』(충청남도역사문화원, 2007)
『금산 수당리유적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한국도로공사, 2002)
집필자
이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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