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양곡배급조합 ()

근대사
단체
1941년 말 통합적이고 항구적인 전시 식량 통제를 위해 기존 식량배급조합을 해소하고 조직된 식량 유통 및 소비 통제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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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41년 말 통합적이고 항구적인 전시 식량 통제를 위해 기존 식량배급조합을 해소하고 조직된 식량 유통 및 소비 통제 단체.
설립목적

1937년 중일전쟁 도발, 1939년 조선의 대가뭄으로 시작된 조선의 전시 식량 통제는 식량 생산량의 감소에 더해 전쟁의 장기화와 확대로 더욱 악화되었다. 군수 식량 수요가 급증하며 식량 수급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자 식량 통제에 대한 종합적·일원적·항구적인 국가 통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41년부터 쌀에 대한 공출과 배급을 강화하여 각 도별 소비고와 생산고를 비교해서 과잉도와 부족도를 결정한 후 과잉도의 과잉미는 총독부 관리미로 하여 통제하였다. 이러한 공출과 배급을 담당할 기구로서 1939년 말부터 결성된 식량배급조합을 해소하고 도양곡배급조합(道糧穀配給組合, 도배)을 조직하였다.

연원 및 변천

도양곡배급조합에 모인 양곡 중 수·이출분은 조선양곡중앙배급조합을 통해 수·이출하고 국내 소비분은 도양곡배급조합이 과잉도에서 부족도로 보냈다. 도내에서 유통 소비되는 양곡은 도양곡배급조합→부군도양곡배급조합→소매업자→일반소비자, 도양곡배급조합→특수소비자 의 이중 루트로 배급되었다. 일반 소비자가 양곡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배급 통장이 있어야 했고, 현재 신고한 가족수만큼 1일 필요 양곡량에 따라 배급했다. 배급 양곡 중 쌀과 잡곡의 비율이 대체로 37:63이었는데, 점차 식량 부족이 심각해지면서 잡곡 비율이 늘었고, 질적인 면에서도 잡곡은 만주 좁쌀이나 콩깻묵과 같은 매우 열악한 것이었다. 쌀의 도정율도 1942년부터는 5분도미로 낮아졌고 아예 현미식을 강요하기도 했다.

1943년 9월 조선식량관리령이 공포되면서 보다 강력하고 일원적인 식량의 국가 통제를 위해 도양곡배급조합은 해소되고, 조선식량영단이 설립되었다.

기능과 역할

도양곡배급조합은 도지사가 지정하는 양곡업자 및 거래 실적이 있는 양곡 생산자[지주]로 조직되었고 그 업무 및 운영은 도지사가 지휘 감독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양곡배급조합은 대부분 도내 미곡상 중에서 일부 유력한 미곡상을 중심으로 조직하여 그들에게 쌀 유통을 전담케 함에 따라 중소 미곡상들은 점차 배제되어 부군도(府郡島) 양곡배급조합의 조합원이 되거나 소매상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점차 도태되어 갔다. 또한 기존의 식량배급조합은 미곡조합과 잡곡조합이 병립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도양곡배급조합은 미곡부와 잡곡부의 2부제로 두 조합을 동일 조합 내로 포섭하여 일원적 통제를 시행하였다.

의의와 평가

도양곡배급조합은 1941년부터 조선 내 식량의 유통, 배급 통제를 담당한 기관으로서 미곡 뿐만 아니라 잡곡을 망라하여 식량 통제를 일원화 하였고, 1943년 조선식량영단이 설립되면서 해소되었다.

참고문헌

『매일신보(每日新報)』(1940.11.26)
『朝鮮食糧管理』(朝鮮食糧營團, 1945)
『일제하 전시 농업정책과 농촌 경제』(이송순, 도서출판 선인, 2008)
『한국양정사(韓國糧政史)』(농수산부, 1978)
집필자
이송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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