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1월 북한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게릴라 부대(124군부대)를 침투하였다. 한국의 군경은 청와대 부근까지 접근한 북한의 게릴라들을 소탕하였지만 한국 내 안보 위기의식은 크게 고조되었다.
북한은 닷새 후 원산 앞바다에서 작전 중이던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함으로써 미국의 대규모 무력시위를 야기하였다. ‘제2의 한국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국내외적으로 우려되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미국 존슨 대통령은 1968년 4월 17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한미 연합 방위 능력 제고를 위한 정책협의 · 조정을 위해 그간의 국방장관 회의를 연례화하기로 합의하였다.
한미 양국은 1971년 국방장관회의를 안보협의회(Security Consultative Meeting)로 명칭을 변경하고, 군사 기술적 차원을 넘어 동맹체제의 문제 등 포괄적인 안보협력을 회의 주제로 다루기로 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이 독재화되고 인권탄압을 자행하자 항의의 표시로 안보협의회를 기피하고 대신 합참의장으로 구성되는 군사위원회(Military Committee Meeting)를 안보협의회의 소위원회로 설치하고 1978년 한미연합사 창설과 함께 본격 가동하였다.
양국은 군사적 필요에 따라 1978년 제11차 안보협의회 공동성명에서 핵우산의 지속적 역할을 지지하며 확장 핵 억지 개념을 공식화하였다. 이후 확장 핵 억지는 안보협의회의 공동성명에 빠짐없이 포함되었으며, 1990년 이후에는 북한에 대한 주요 억지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1987년 제19차 안보협의회에서는 전시주둔국지원협정(Wartime Host Nations Support)에 관한 양해각서가 교환되었고, 제20차 회의에서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 정액 지원이 결정되었다.
북한은 한미안보협의회를 '전쟁을 준비하는 작당'이라고 비난해 왔다. 2020년 회의 직후 북한은 이 회의가 '남한 군대가 상전과 벌인 불순한 모의판'이며 '동족을 겨냥한 전쟁 불장난을 계속 벌이겠다는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미안보협의회는 한반도 ·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는 핵심축(linchpin)으로서 한미동맹의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오고 있지만, 다른 한편, 한미안보협의회가 매년 발표하는 공동성명이 담고 있는 확장 핵 억지 공약은 북한의 핵 보유가 기정 사실화되면서 한국 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는 핵우산의 신뢰성을 의문시하는 정치인들은 한국의 자체 핵무장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이 과연 서울을 위해 로스앤젤레스를 위험에 빠뜨리겠는가라며 한국이 최소한 전술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전략적 분별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치인들은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할 경우 북한의 핵무기 폐기를 요구할 명분이 사라지고, 나아가 핵확산 금지체제 유지를 국가안보전략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미국 등 국제사회의 제재의 대상되는 등 득보다 실이 훨씬 크다고 반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