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식의 문집인 『택당집(澤堂集)』에 수록된 글 중에서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전반 정치적·사회적 현안에 관련된 글을 선별하여 수록한 문헌이다. 특히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안들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송시열(宋時烈)의 글을 선별하여 채록한 『우암유사(尤菴遺事)』와 김창흡(金昌翕)의 글을 채록한 『삼연유사(三淵遺事)』가 부록으로 합편되어 있다.
서문과 발문이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필사자와 필사의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본문 중에 이식의 이름인 ‘식(植)’이 그대로 기록되었고, ‘금상(今上)’이라는 표현의 세주(細註)에 ‘인조(仁祖)’의 묘호가 함께 기록되어 있고, 부록으로 합편된 『우암유사』와 『삼연유사』의 내용들이 모두 송시열과 김창흡의 문집에 수록된 글 중에서 일부를 채록한 것이라는 점에서 필사의 시기는 『삼연집(三淵集)』이 간행된 이후인 18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된다.
불분권 1책의 필사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이 유일본이다. 표제와 권수제는 ‘택당유사’이고, 광곽(匡郭)과 계선(界線), 판심(版心)이 없다.
내용은 별도의 구분 없이 수록되었다. 『택당유사』의 앞부분에는 기축옥사(己丑獄死)와 연관하여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정치적 사건을 서술했는데, 기본적으로 붕당(朋黨)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표현했다. 인조반정 직후 윤방(尹昉)과 이수광(李睟光)이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수정을 건의했던 일의 정당함, 김덕령(金德齡)이 용맹한 장수로서 임진왜란에 공을 세웠음에도 억울하게 옥사(獄死)한 이후 의병(義兵)이 일어나지 않았고 정유재란 당시 호남 지역에서는 군사모집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식이 직접 참여하여 진행했던 『선조수정실록』의 편찬 작업에 관한 일의 진행 상황과 자신이 참여하여 진행했던 일들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했다.
수록된 「시아대필(示兒代筆)」, 「추록(追錄)」, 「산록(散錄)」은 『택당선생별집(澤堂先生別集)』 권15에 수록된 내용과 동일한데, 다만 『택당유사(澤堂遺事)』의 「산록」에는 『택당선생별집』 권15의 「산록」에 수록된 몇 가지 조항이 누락되어 있다. 후반부에는 구성(具宬)의 행장(行狀), 이안눌(李安訥)의 행장, 기대승(奇大升)의 시장(諡狀) 등을 인용하여 기축옥사와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쟁 등에 대한 논의를 수록했다.
『우암유사』에는 송시열이 안방준(安邦俊)에게 보낸 편지, 박세채(朴世采)에게 보낸 편지, 『송자대전(宋子大全)』 131권에 수록된 「연거잡록(燕居雜錄)」, 『송자대전』 권147에 수록된 명나라 숭정제(崇禎帝)의 어필(御筆)에 대해 김수항(金壽恒)이 지은 글에 대한 발문인 「서문곡소기숭정황제어필후(書文谷所記崇禎皇帝御筆後)」, 『송자대전』 권151에 수록된 「고선고비묘문(告先考妣墓文)」, 『송자대전』 권157에 수록된 황일호(黃一皓)의 신도비문 일부 등 송시열의 글이 다양하게 채록되었다.
『삼연유사』에는 『삼연집』 권27에 수록된 조성기(趙聖期)의 묘지명인 「졸수재조공묘지명(拙修齋趙公墓誌銘)」의 일부, 『삼연집』 권21에 수록된 편지 「답이현익(答李顯益)」의 후반부에 수록된 「첨론이현익금수오상설(「籤論李顯益禽獸五常說)」, 『삼연집』 권22에 수록된 이덕수(李德壽)에게 보낸 편지로서 송시열과 박세당(朴世堂)의 관계에 대해 논의한 편지인 「여이덕수(與李德壽)」 등이 수록되었다.
이식, 송시열, 김창흡은 모두 조선 후기 서인의 대표적인 문장가이자 학자로서 『택당유사』는 이들의 문집에 수록된 글 중에서 특히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안들과 연관된 글들을 중점적으로 수록했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 서인의 학문적 정당성을 천명하고자 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인과 노론의 당론서(黨論書)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