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계’는 지나간 잘못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경계한다는 뜻으로, 그 저변에는 유교 사상이 깔려 있다. 그러므로 감계화는 유교 경전의 내용이나 문헌 사료에 기술된 역대 제왕과 충신·효자·열녀의 사적을 소재로 그려졌다. 이에 위정자(爲政者)의 윤리와 올바른 통치관을 확립하고, 왕실과 종친, 신하 및 백성의 교화를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어 널리 활용되었다.
고려시대부터 궁궐 전각 벽면에 감계화를 그리던 전통이 있었다. 조선 건국 이후 감계화는 궁중에서 가장 빈번하게 진상되고 열람된 화목(畵目)으로 자리 잡았으며 왕조 말기까지 꾸준히 제작되었다. 역대 국왕들은 감계화를 늘 가까이 하면서 스스로 경계하였고, 백성들의 교화를 위해 목판화로 서적을 간행하여 전국에 배포하기도 했다. 감계화는 왕의 주문에 의해 화원이 제작하거나 신하가 무역과 사행을 통해 구하여 국왕에게 진상하는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궁궐 안에 수장되어 열람되었다.
조선시대 감계화는 농사하고 잠직하는 백성들의 어려움과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한 무일도(無逸圖)와 빈풍도(豳風圖) 유형, 성군(聖君)과 현비(賢妃)의 사적을 그린 성군현비고사도(聖君賢妃故事圖) 유형, 심성과 효행 교육을 위한 양정도(養正圖)와 성적도(聖蹟圖) 및 행실도(行實圖) 유형 등 다양한 목적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제작되었다.
빈풍칠월도와 무일도는 조선 초기부터 국왕의 성찰에 활용된 대표적인 감계화로서 왕조 말기까지 꾸준히 그려졌다. 경직도는 농사와 잠직의 생활을 월령 형식으로 구성한 빈풍칠월도와 같은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1697년(숙종 23)에 중국에서 『패문재경직도(佩文齋耕織圖)』가 전래된 이후 숙종이 다양한 경직도 병풍을 제작하여 왕세자가 머무르는 동궁에 진설하도록 하였다. 진재해(秦再奚)의 〈잠직도(蠶織圖)〉는 당시 제작 경향을 시사한다.
태종 연간부터 제작된 성군현비고사도는 고종 연간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제감도설(帝鑑圖說)』 같은 명나라 제왕학(帝王學) 교재의 유입에 따라 이를 토대로 제작하기도 했다. 1691년(숙종 17)의 《선악도병(善惡圖屛)》이 대표적이다. 현비고사도인 현비병, 후비명감, 후비가계병풍이나 행실도류 열녀도는 조선에 유입된 『고금열녀전(古今列女傳)』, 『고열녀전(古列女傳)』의 영향 아래 제작되었다. 이처럼 성군현비고사도는 당대의 정치 상황을 반영하고 왕의 권위를 확립하거나 합법적인 통치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해석된다.
마지막으로 양정도와 성적도는 왕세자의 심성·효행 교육을 위해 제작된 감계화이다. 1413년(태종 13) 『효행록(孝行錄)』을 전거로 효자도 병풍을 제작하였다는 기록은 일찍부터 왕세자의 교육에 『효경(孝經)』이 중요시된 정황을 시사한다. 숙종~정조 연간에는 양정도와 성공도(聖功圖), 그리고 성적도 제작이 선호되었으며 특히 『소학(小學)』 이나 『양정도해(養正圖解)』를 전거로 하였다. 숙종 연간에 김진여(金振汝)가 그린 《성적도첩(聖蹟圖帖)》, 영조 연간의 《선가법첩(善可法帖)》이 그러하다. 한편 행실도는 유교의 기본 원리인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백성들에게 교화할 목적으로 제작한 것이다. 1434년(세종 16) 『삼강행실도』를 시작으로 『속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 『오륜행실도』로 이어졌다.
대표작으로는 진재해의 〈잠직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작자 미상의 〈사현파진백만대병도(謝玄破秦百萬大兵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작자 미상의 《도해역대군감》(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김진여의 《성적도첩》(국립전주박물관 소장), 영조 어제필의 《선가법첩》(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감계화는 주로 병풍과 족자로 장황되어 일정 공간에 진설되거나 판화로 제작되어 배포되기도 했다. 대체로 진채(眞彩)로 제작하였지만, 채색이 없는 순묵화(純墨畵)로 제작된 사례도 있다. 이는 1721년(영조 11) 홍성보(洪聖輔)의 상소처럼 어린 왕세자의 경우 회화에 탐닉하여 뜻을 잃을 수 있다는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감계화는 감계와 교화에 뚜렷한 목적을 두었기에 회화 이미지보다 담고 있는 내용에 주목하여 제작한 특징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