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석도는 기이한 형상의 바위를 그린 그림이다. 괴석도는 중국을 다녀온 사신들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이후 19세기 문인들의 바위 애호 풍조와 함께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문인들은 변하지 않는 군자의 모습이나 오래 사는 장수를 표현하기 위해 괴석도를 그렸다. 조선 말기 대표적인 괴석도 화가는 수직으로 상승하는 괴석을 그린 정학교이다. 현재 심사정·강세황의 괴석도를 비롯하여 이정직·정학교의 괴석도 등이 남아 있다. 조선 시대 괴석도는 중국의 괴석도 전통을 기반으로 나름의 개성적인 화풍을 보여 준다.
예로부터 돌은 모든 자연물 가운데 천지의 정밀한 기운을 부여받은 대상물로 여겨졌다. 괴석이 지닌 불변성은 변하지 않는 이상적인 군자의 모습과 부합되어 문인들 사이에서 회화의 소재로 이용되었다. 또한 장수를 상징하여 축수(祝壽)를 기원하는 회화로도 그려졌다.
괴석도는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십죽재서화보(十竹齋書畵譜)』 등 화보와 더불어 연행을 다녀온 사신들이 직접 접하였던 괴석도에 대한 소개를 통해 조선 후기 문인화가들에게 알려졌다. 조선 후기에는 정원문화와 괴석 애호 풍조가 결합된 문화 현상 아래 괴석도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괴석은 주로 사군자나 화훼와 함께 그려졌으나, 조선 말기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축수도(祝壽圖) 성격을 띤 단독 괴석도로 많이 제작되었다.
괴석도는 김정희(金正喜)를 비롯한 19세기 문인들의 애석(愛石) 풍조와 함께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김정희는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 등 청대 문사들과 교유하며 미불이 가장 아꼈던 보진재연산(寶晉齋硯山)을 그린 「연산도(硯山圖)」를 직접 그렸으며, 신위(申緯)는 중국 상산(象山)에서 가져온 돌들을 보고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와 교유한 김유근(金逌根)의 『연산도첩(硯山圖帖)』은 이 같은 현상과 무관하지 않으며 19세기 조선과 청 문인 간의 문화 교류에 따른 괴석도 제작 현상을 반영한다. 이 외에도 이정직(李定稷)은 1888년 상해 홍문서국에서 석판인쇄 기법으로 새롭게 간행한 석인본(石印本) 『개자원화전』을 참고하여 괴석도 화첩을 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주목되는 화가는 괴석을 전문적으로 그린 정학교(丁學敎)이다. 정학교는 세로로 긴 화면에 농묵과 담묵을 적절히 사용하여 수직으로 상승하는 괴석의 형상을 즐겨 그렸다. 그의 괴석도는 구멍이 뚫린 괴석과 날카롭고 각진 괴석으로 구분된다. 특히 층층이 쌓아 올린 괴석 형상은 청대 서화가 주당(周棠)의 괴석도 혹은 청대에 간행된 『해상명인화보(海上名人畵譜)』에 수록된 괴석도의 영향을 짐작케 한다.
정학교에 의해 크게 유행한 괴석도는 이후 김영(金瑛)·윤용구(尹用求)·양기훈(楊基薰)·안중식(安重植)·강진희(姜璡熙) 등 문인 서화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수직으로 상승하는 구멍 뚫린 각진 괴석도 화풍을 계승하였다. 김영은 부드러운 필묵과 담채, 먹점을 특징으로 하는 괴석도를, 윤용구는 부드러운 담묵 선묘로 파도치듯 윤곽을 그리거나 직사각형의 괴석 등 개성적으로 해석한 괴석도 화풍을 형성하였다.
대표작으로는 『겸현신품첩(謙玄神品帖)』에 수록된 심사정의 「화조괴석도」(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강세황의 「괴석도」(개인 소장), 이정직의 『석정가묵』(개인 소장), 정학교의 『괴석도』(8폭병풍, 한양대학교 박물관 소장), 정학교의 『괴석도』(10폭병풍,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김영의 「괴석도」(미국 보스턴 미술관 소장), 윤용구의 『괴석묵죽난도』(12폭병풍, 개인 소장), 양기훈의 『산수일출도』(가리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강진희의 『괴석종정도』(가리개, 개인 소장) 등이 있다.
조선시대 괴석도는 중국에서 전래된 화보는 물론 청대 화단과 밀접하게 관련되며 제작되었다. 특히 정학교를 위시한 여러 서화가들의 괴석도는 중국의 괴석도 전통을 기반으로 나름의 개성적인 화풍으로 소화한 특징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