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명부 제도는 성종 때 문·무 상참관(常參官) 이상 관료의 모와 처를 봉작하면서 성립하였다. 국왕의 즉위와 책봉, 태후와 왕태자의 책봉, 국왕의 순행 등 나라의 경사나 왕실 의례가 있을 때 비정기적으로 외명부 봉증이 이루어졌다. 그 대상은 대체로 직사(職事) 상참 이상 및 산관(散官) 4품 이상 관료의 모와 처였다. 직사 7품 이상 및 산관 5품 관료의 경우는 그 어머니에게만 외명부 칭호를 내렸다. 처음 외명부에 봉할 때는 현군의 명호를 수여하고, 그 뒤 다시 봉작할 때는 군군(郡君), 그 다음은 군대부인(郡大夫人)의 순서대로 올려주었다.
현군의 봉작을 받은 인물로는 문종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낸 이정(李頲)의 처 상당현군(上黨縣君) 왕씨, 예종 때 이부낭중(吏部郞中) 문공미(文公美)의 처 대녕현군(大寧縣君) 최씨, 인종 때 황보양(皇甫讓)의 처 낙랑현군(樂浪縣君) 김씨와 최루백(崔累伯)의 처 봉성현군(峯城縣君) 염씨 등이 있다. 현군의 칭호 앞에는 대체로 본인의 출신 관향을 나타내는 두 글자의 군현 명칭을 붙였다. 예컨대 대녕현군 최씨는 해주(海州) 출신 최사추(崔思諏)의 셋째 딸로 대녕(大寧)은 해주의 별호였다.
고려 말 부인에 대한 봉증이 문란해져서 예제를 따르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에 1391년(공양왕 3) 남편의 직품에 따라서 부인에게 봉작을 내리도록 외명부 제도를 정비하였다. 문무 5·6품관의 정처(正妻)를 현군이라 하며, 그 어머니를 현대군(縣大君)으로 정하였다. 세 아들이 과거에 합격한 어머니로서 남편의 직품이 없는 경우에도 현군에 봉하도록 하였다.
현군 등 외명부의 봉작은 국왕이 관인 지배층을 우대하여 그 집안의 여성에게 공적 칭호를 내리는 일이었다. 이는 지배층 여성을 사회적으로 공인하는 기능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