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군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에 공훈을 세운 신료와 일정 직품 이상 관료의 어머니와 아내에게 수여한 외명부(外命婦) 정4품의 칭호.
이칭
이칭
군대군(郡大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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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고려시대에 공훈을 세운 신료와 일정 직품 이상 관료의 어머니와 아내에게 수여한 외명부(外命婦) 정4품의 칭호.
내용

998년(성종 7)에 상참관(常參官) 이상 문·무 관료의 모와 처를 봉작하는 외명부 제도가 성립하였으며, 현종 이후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성종 때 상서예부시랑을 지낸 채인범(蔡仁範)의 후처 장씨를 청주군군(淸州郡君)에 봉한 것이 첫 사례이다. 현종 때에는 거란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 왕좌섬(王佐暹)의 처 김씨를 개성군군(開城郡君)에 봉하였다.

군군 등 외명부의 칭호를 내리는 일은 왕이 비정기적으로 베푼 은사였다. 국왕의 즉위와 책봉, 태후와 왕태자의 책봉, 국왕의 순행 등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왕실 의례를 거행하면서 외명부를 봉작하거나 추증하였다. 그 대상은 대체로 직사(職事) 상참 이상 및 산관(散官) 4품 이상 관료의 모와 처였다. 직사 7품 이상 및 산관 5품의 경우는 그 어머니만을 외명부로 삼았다.

관료의 모와 처는 처음에 외명부 정6품 현군(縣君)에 봉하였고, 그 뒤 다시 봉호를 내릴 때 정4품의 군군으로 올렸으며, 또다시 봉작할 때 군대부인(郡大夫人)으로 승급하였다. 인종 때 황보양(皇甫讓)의 처 김씨는 1122년(인종 즉위)에 낙랑현군(樂浪縣君)에 봉해졌다가 1124년(인종 2)에 낙랑군군이 되었으며, 1133년(인종 11)에 군부인에 올랐다. 군군과 군대부인은 같은 외명부 정4품의 봉호였지만 군군이 군대부인에 비하여 좀 더 낮은 지위의 칭호라고 할 수 있다.

군군에 봉해진 인물로는 양규(楊規)의 처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 윤언영(尹彦榮)의 처 하원군군(河源郡君) 유씨 등이 있다. 군군의 칭호 앞에는 두 글자의 읍호를 붙였는데, 대체로 본인의 출신 관향을 나타내는 군현의 명칭을 썼다. 예컨대 하원군군 유씨는 정주(貞州) 출신 유홍(柳洪)의 딸인데 하원은 정주 소재 하원도(河源渡)에서 비롯한 명칭이었다. 신료의 어머니로서 군군의 봉작를 받았을 때에는 대(大)자를 붙여서 군대군(郡大君)이라 일컬었다. 즉 양원준(梁元俊)의 어머니는 음성군대군(陰城郡大君) 박씨(朴氏)로 불리었다.

변천 및 의의

고려 말 부인에 대한 봉증이 문란해져서 예제를 따르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에 1391년(공양왕 3)에 남편과 아들의 직품에 따라서 부인을 봉작하도록 외명부 제도를 정비하였다. 문무 4품관의 정처를 군군이라 하며, 그 어머니를 군대군으로 정하였다.

군군 등 외명부 제도는 관인 지배층을 우대하여 그 집안의 어머니와 부인에게 명예로운 칭호를 내려서 공적 지위를 부여하는 일이었다. 군군의 봉호는 지배층 여성을 사회적으로 공인하는 기능을 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묘지명집성』(김용선 편, 한림대학교 출판부, 2012)
「고려 전기의 외명부」(김아네스, 『역사와 경계』 87, 부산경남사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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