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는 왕조시대의 차기 왕위계승권자이다. 왕세자·동궁·저궁(儲宮)·춘궁(春宮)·이극(貳極)·정윤(正胤)이라고도 하며, 존칭어로는 저하(邸下)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부자세습의 왕위 계승 원칙이 확립된 이후에 국왕의 장자로 왕의 재위 기간 중에 책립(冊立) 또는 책봉(冊封)의 의식을 거쳐 결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정비 소생의 적장자가 우선적으로 태자가 될 수 있었으나 장자가 불초하거나 정비에게 소생이 없을 때에는 후궁 소생에게도 자격이 부여되었다. 직계 왕자가 없으면 방계 왕족 중에서 대왕대비의 전교(傳敎)로 택정되었다.
왕세자 · 동궁(東宮) · 저궁(儲宮) · 춘궁(春宮) · 이극(貳極) · 정윤(正胤)이라고도 한다. 존칭어로는 저하(邸下)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특히, 왕세자는 약칭 세자로 널리 쓰였는데, 이는 몽고의 간섭을 받아 제도 및 용어를 격하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말로 조선 말기까지 사용되었다. 이후 1897년 10월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정하면서 태자의 용어가 복고되었다.
태자 또는 왕세자는 왕위 계승이 부자세습제로 확립되면서 대두된 것으로, 초기국가시대의 귀족회의에서 왕을 선출하던 시기에는 등장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태자의 기원은 왕위의 부자세습이 이루어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왕위의 부자세습이 이루어지기 이전에도 태자의 기사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는 ‘큰아들’이라는 의미와 혼용되었기 때문에 그 의미를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렵다.
태자는 부왕의 재위 기간 중에 책립(冊立) 또는 책봉(冊封)의 의식을 거쳐 결정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경우 서기전 19년(동명왕 19) 4월에 왕자 유리(琉離)를 태자로 책립하고 그 해 9월에 유리명왕으로 즉위했다고 되어 있다. 백제의 경우는 10년(온조왕 28)에 온조왕의 원자(元子) 다루(多婁)를 태자로 삼고, 28년에 다루왕으로 즉위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신라의 경우는 24년에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이 남해(南解)의 태자로서 즉위했지만, 태자로 책봉된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또 566년 (진흥왕 27) 2월에 ‘ 진흥왕이 왕자 동륜(銅輪)을 왕태자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그 뒤 동륜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죽고 진지(眞智)가 즉위하였다.
태자(세자)의 자격 조건은 우선 국왕의 장자여야 하였다. 이 원칙은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를 통해 규범화되었다. 즉, 적자(嫡子)에게 나라를 전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원자가 불초(不肖)하면 그 차자(次子)에게 전하고, 차자도 불초하면 형제 중에서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은 자에게 전해 대통을 계승한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정비 소생의 적장자가 우선적으로 태자(세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장자가 불초하거나 정비에게 소생이 없을 때에는 후궁 소생에게도 자격이 부여되었다. 태자(세자)가 즉위 전에 죽은 경우에는 제자(諸子) 중에서 택정되었다. 따라서, 왕에게 아들이 없을 때는 태자의 택정이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이런 경우는 왕이 유언으로 추대한 인물이나 왕이 죽은 뒤에 후대 왕을 추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방계에서 태자를 택정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예컨대, 신라 효성왕은 아들이 없자 아우 헌영(憲英)을 739년(효성왕 3)에 태자로 삼고, 그가 742년에 경덕왕으로 즉위하였다. 이 경우는 엄격하게 말하면 태자가 아니라 태제(太弟)로 봄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소성왕의 경우는 원성왕의 손자로 아버지는 인겸(仁謙)이다. 아버지가 일찍 죽자 795년(원성왕 11)에 태자로 책립되었다가 799년에 소성왕으로 즉위하였다. 이 경우는 태자보다는 태손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왕과 태자와의 관계가 아들이나 손자 또는 동생 등과 관계없이 다음 왕위계승권자라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조선시대에도 직계 왕자가 없어 태자(세자)의 책립이 불가능한 경우가 있었다. 인종 · 명종 · 경종 · 헌종 · 철종의 예가 그러하였다. 인종 · 경종의 경우는 세제를 책립해 왕위를 계승하게 했으나 명종 · 헌종 · 철종의 경우는 방계 왕족 중에서 대왕대비의 전교(傳敎)로 택정되었다. 이때는 왕위계승자와의 친소 관계 또는 친인척 관계 등과 얽혀 중신들간에 분열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태자(세자)의 택정 논의를 건저의(建儲議)라 하는데, 형식적으로는 중신들이 왕자들 중에서 군도(君道)를 갖춘 이를 추대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부왕의 뜻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되어 있어, 때로는 왕과 신하, 신하와 왕자간에 갈등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398년(태조 7)에 정도전(鄭道傳)은 방석(芳碩)의 세자 책봉을 옹호하다가 방원(芳遠)에게 죽음을 당했고, 1591년(선조 24)에는 정철(鄭澈)이 건저 문제를 거론했다가 선조의 미움을 사 옥사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689년(숙종 15)에는 숙종이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소생 윤(昀)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노론 송시열(宋時烈) 등이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젊고 곧 후사를 이을 왕자를 가지게 될 것이라며 후궁 소생임과 시기상조론을 들어 반대하다 옥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편 태자를 미리 결정한 것은, 첫째 왕위의 공백을 최소화하고, 둘째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국의 혼란을 막고 전대 왕의 정치를 안정적으로 계승하며, 셋째 일찍부터 태자로 책립해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교양과 덕목을 쌓고 군주의 자질을 함양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태자로 한번 책립되면 나이에 관계없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 있다. 신라 혜공왕은 8세, 고구려 태조왕은 7세, 고려 충목왕은 6세, 충정왕은 10세, 조선의 단종은 12세, 명종은 12세, 순조는 11세, 헌종은 8세로 10세 전후의 어린 태자가 왕으로 즉위하였다.
다만, 백제의 사반(沙伴)은 구수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는데, 나이가 어리다 하여 개루왕의 둘째아들 고이왕이 즉위한 예외가 있을 뿐이다. 그리나 당시 사반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태자에 책립되면 능력에 관계없이 그 자리를 양보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예외로 조선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讓寧大君)은 1404년(태종 4)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왕세자로서의 지켜야 할 예의 범절이나 딱딱한 유교적 교육 및 엄격한 궁중 생활을 싫어한 나머지 결국 1418년 6월에 폐위되고 그 자리를 동생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넘겨준 사실이 있다.
이와 경우는 다르지만 소현세자(昭顯世子)는 1625년(인조 3)에 세자로 책봉되고 병자호란 후 9년 간이나 청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했음에도 아버지 인조의 눈밖에 나서 원인 불명의 병으로 급서하고 동생 봉림대군(鳳林大君)에게 그 자리를 넘겼다.
태자(세자)는 차기 왕이기 때문에 왕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았다. 따라서 동궁 또는 세자궁이라는 독립된 기관을 가지고 인원과 예산이 배정되었다. 특히 세자에게 중시된 것은 교육과 신변 보호였다.
동궁아관(東宮衙官) · 동궁관 등으로 불려오다가 1392년(태조 1) 신정 관제 때 세자관속(世子官屬)으로 개칭된 이 기구가 바로 이러한 일을 맡았다. 이것은 뒤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로 분리되어 각각 교육과 신변 보호 일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