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친영은 16세기 이후 서울의 일부 사대부 집안을 중심으로 시행된 혼례 의식이다. 조선 초기까지 혼례 풍속은 남귀여가혼이 일반적이었다. 성리학자들은 신랑이 신부집에 거주하는 방식은 양이 음을 따르는 문제를 야기시킨다고 보고 『주자가례』에 따른 친영례의 도입을 주장해 왔다. 이에 ‘반친영(半親迎)’이라는 절충안이 등장하였다. 반친영은 대례를 신부의 집에서 지내고, 다음날이나 혹은 삼 일째 되는 날 신랑의 집에서 구고지례를 지내는 것이다. ‘반친영’은 전통적 혼인 방식 위에 친영혼의 일부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전통 혼례와의 타협을 모색한 데서 그 의의가 있다.
친영혼에서는 성혼 당일 신랑집에서 신혼부부가 교배례(交拜禮)에서 동뢰(同牢) · 합근례(合巹禮)로 이어지는 ‘당일상견례(當日相見禮)’를 한 후 동침하였다. 또한 상견례 다음날 시부모를 뵙는 ‘현구고례(見舅姑禮)’를 행하고 신랑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에 반해 남귀여가혼에서는 성혼 첫날 신부집에서 동침부터 한 후 3일째 되는 날에야 상견례(삼일상견례)를 하였다. 또한 신혼생활을 신부집에서 시작하여 시부모를 뵙는 것은 별도의 날을 잡아야 했다.
성리학을 신봉한 사대부 가운데 좀더 고례(古禮)를 충실히 지키고자 하는 일부 인사들은 일찍부터 전통혼속에서의 신부집 거주방식이 양이 음을 따르는 문제를 야기시킨다고 보고 『주자가례』에 따른 친영의 도입을 강력히 주장해왔다. 또한 동침부터 먼저 한 후 3일째에야 상견례를 치르는 혼인절차도 예의에 벗어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생활양식 및 습속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에 대한 반발 때문에 친영의 시행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성리학의 존숭이 절정으로 치닫게 되는 16세기에 이르면 친영례의 시행을 강요하는 대신 남귀여가혼의 절차 중 외설스럽다고 지적받는 ‘삼일상견례’만이라도 ‘당일상견례’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선도하였던 것은 서경덕과 조식이었다. 당일상견례는 중종대에 서경덕 아들의 혼인에서 처음 시행된 이후 명종 · 선조대를 거치며 조식 · 이황 등의 자녀들이 혼인할 때에도 적용되었다.
‘반친영(半親迎)’은 이렇게 남귀여가혼의 혼인절차 일부를 수정한 ‘당일상견례’가 어느 정도 사족들에게 수용되기 시작하자, 이에 고무된 일부 인사들이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성혼 다음날 시부모를 뵈러 가는 ‘명일현구고례’까지 채택함으로써 성립한 것이다. 그러나 처방거주(妻方居住)를 택하던 당시에 반친영 절차의 시행은 용이한 것이 아니어서, 널리 확산되지 못하였다.
반친영은 혼례장소를 속례인 남귀여가혼과 마찬가지로 신부집으로 하되, 혼인절차는 친영혼의 절차를 일부 원용하여 ‘당일상견례’와 ‘명일현구고례’를 채택하였던 혼례방식이다. 혼례를 신부집에서 치른다는 것이 친영례 본래의 정신에 배치되는 데도 불구하고 이를 ‘반(半)친영’이라 명명하였던 것은, 남귀여가혼의 혼인절차를 변개하여 친영혼의 혼인절차 일부를 받아들였음을 강조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혼례 후 상당기간 처가에서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이던 당시에 반친영의 두 번째 요건인 명일현구고례의 시행은 그다지 용이치 않았다. 친영을 행하였다는 기록은 간혹 나타나는 반면 ‘반친영’의 시행을 명시한 구체적 사례를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이러한 사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만 서울에 사는 집안끼리 혼인한 경우에는 거리로 인한 물리적 장애가 없었을 것이므로 상대적으로 반친영을 시행하는 것이 용이했으리라 보인다.
초창기 연구에서는 당일상견례를 선도한 서화담과 조식을 반친영의 창시자로 오해하였을 뿐 아니라, 중기 이후 반친영이 보편화된 것으로 잘못 추정한 바 있다. 반친영에 대한 이러한 오해 · 착오가 오랫동안 불식되지 못하고 널리 수용되었던 것은 성리학의 확산과 함께 혼인방식도 전통적인 남귀여가혼에서 친영혼으로 바뀌었을 것이라는 예단이 강하게 작용했던 탓으로 보인다.
‘반친영’은 남귀여가혼의 혼인방식을 친영혼으로 바꾸는 대신 전통적 혼인방식 위에 친영혼의 일부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전통혼례와의 타협을 모색한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신부가 성혼 다음날 시부모에게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보편화되지 못하였다. 인조대 무렵 친영과 전통혼례와의 또 하나의 타협책으로 ‘가관친영(假館親迎)’이라는 예법이 등장하게 되는데 징검다리 구실을 하였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