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관친영 ()

가족
의례·행사
신랑집과 신부집 사이의 거리가 멀 경우에 두 집 사이에 한 장소를 빌려서 치루는 혼례의식. 혼례.
정의
신랑집과 신부집 사이의 거리가 멀 경우에 두 집 사이에 한 장소를 빌려서 치루는 혼례의식. 혼례.
연원 및 변천

가관친영(假館親迎)은 『주자가례』에 실려 있는 친영 절차의 한 유형으로, 이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정자(程子)에게서 비롯되었다. 정자는 중국 봉건시대 제후가 모두 친영한 것으로 간주한 앞선 유가의 설을 반박하며, 제후들이 남에게 종묘와 사직을 맡겨두고 국경을 넘을 수 없어 국경 근처에 관소를 설치하고 거기서 신부를 맞아왔다고 주장하였다. 주자는 이러한 정자의 주장을 수용하였고, 이를 사서인의 혼례에 적용해 『주자가례』에서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하였다.

가관친영의 혼인절차는 조선에서 국왕과 사대부의 혼인 모두에 적용되었다. 국왕혼인의 경우에는 중종의 혼인에 1차례, 선조의 혼인에 2차례 시행된 후 인조대 이후부터 별궁친영(別宮親迎)으로 바뀌게 되었다. 사대부의 경우에는 인조대 이후 약 50여 년간 호서사림을 중심으로 시행되다가 조선후기에는 간간이 명맥만 유지하게 되었다.

행사내용

국왕의 가관친영은 ‘지존(至尊)’인 국왕이 직접 왕비를 맞으러 개인집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여 시행된 것이다. 이에 반해 사대부 혼례에 있어서는 친영례를 본래의 절차대로 시행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현실적 사정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니, 국왕의 가관친영과 사대부의 가관친영은 그 시행의 시기나 의의를 전혀 달리한다.

  1. 국왕의 가관친영례

조선초기 왕세자․왕자․공주 등의 왕실혼인은 모두 친영례에 의해 진행되었던 데 반해 국왕의 혼인에는 친영례가 적용되지 않았다. 국왕이 사신을 왕비집에 보내<그림1-①> 전안례를 치르고 왕비를 궁궐로 맞아들이게 한 후<그림1-②> 궁궐에서 혼례를 치르는<그림1-③> 방법인 ‘명사봉영(命使奉迎)’의 절차에 의해 시행되었던 것이다. 명사봉영의 절차를 밟는 것은 국왕의 존엄한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본래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역대 황제들이 황후를 맞는 절차였다.

<그림1> 국왕의 명사봉영례

국왕의 혼인에 친영례를 적용하고자하는 논의가 처음으로 발의되었던 시기는 중종대였다. 중종이 사림의 정책을 자발적으로 수용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친영절차에 의해 왕비를 맞을 의사를 표명한 후, 신료들 사이에 찬반 격론이 벌어지게 되었다. ‘고례(古禮)’의 복구를 주장하는 사림은 친영을 시행할 것을 주장한 데 반해, 임금이 신하의 집에 가서 친영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대신들은 『국조오례의』에 따라 ‘명사봉영’을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임금이 신하의 집에 가서 친영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가관친영이었다.

가관친영은 사신이 기러기를 가지고 왕비집에 가서 왕비를 맞아<그림2-①> 미리 마련해 놓은 관소(태평관)에 머물게 한 후<그림2-②>, 그곳으로부터 국왕이 왕비를 맞아(친영)<그림2-③> 궁궐로 돌아와 혼례를 치르는<그림2-④> 형식으로서, 국왕이 왕비를 맞으러 직접 왕비집으로 거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림2> 국왕의 가관친영례

  1. 사대부의 가관친영례

조선시대 위정자들은 건국초부터 『주자가례』에 따라 혼인에 친영례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친영례는 중국의 ‘부방거주(夫方居住)’를 전제로 마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사회에서는 그대로 시행하기 어려운 혼인방식이었다. 그리하여 친영례 시행을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이 경주되었으나, 왕실에서만 친영이 시행되었을 뿐 사서인의 친영례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17세기 예학의 발달과 함께 거주제를 바꾸지 않고도 친영례의 의의를 살릴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모색되었다. 인조대 이래 호서사림을 중심으로 시도되었던 ‘가관친영례’가 그것이다.

『주자가례』에 의하면 사대부의 가관친영례에는 두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는 관소를 신부집 가까운 곳에 마련하여 신랑이 신부집에서 가서<그림3-①> 신부를 맞아(친영)<그림3-②> 관소(가칭 신랑집)에 와서 혼례식을 치르는<그림3-③> 제1의 방식이고, 둘째는 신랑집 근처에 관소를 마련하여 신부로 하여금 관소(가칭 신부집)로 옮겨와 있도록 한 후<그림4-①> 신랑이 관소에 가서<그림4-②> 신부를 맞아(친영)<그림4-③> 신랑집에 돌아와 혼례를 치르는<그림4-④> 제2의 방식이다. 조선에서는 이 외에 신부집을 신랑집으로 임시 가정하여 관소에서 신부를 맞아와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편법이 모색되기도 하였다.

<그림3> 제1의 방식

<그림4> 제2의 방식

17세기 이후 성리학자들이 원용한 가관친영은 주로 신부집 근처에 관소를 설치하여 친영례를 행하는 제1의 방식이었다. 즉 신랑이 기러기를 가지고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맞아 관소에 돌아와 합근‧동뢰연을 행하는 형식이었다. 이상과 같은 절차를 마친 후 신혼부부가 돌아가는 곳도 주로 신부집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사대부의 가관친영례는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가식적이라는 점 때문에 널리 확산되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국왕과 사대부의 혼인에 일시적으로나마 가관친영례가 시행되었던 것은, 주자 지상주의를 지향하던 조선사회에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혼인절차를 마련해 보려했던 시도라 할 수 있다. 중국 황제에 준해 적용하였던 명사봉영례를 포기하면서 나름대로 국왕의 존엄을 유지시키기 위해 가관친영례를 시행하기는 하였으나, ‘천하동례론(天下同禮論)’의 강화에 따라 국왕의 혼례도 친영례에 좀더 가까운 별궁친영례로 변모하게 되었다. 사대부의 가관친영례도, 친영례를 시행하기 어려운 악조건 속에서 남귀여가혼에 친영례 절차의 일부를 가미하여 실천성을 높이고자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남귀여가혼을 친영혼의 혼례 형식으로 치르고자 했던 가관친영례의 시도가 끝내는 실패하고 말았으니, 이는 조선시대 주자 지상주의가 그 한계점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조선왕실의 혼례』(장병인, 민속원, 2017)
「조선전기 국왕의 혼례형태: ‘가관친영례(假館親迎禮)’의 시행을 중심으로」(장병인, 『한국사연구』 140, 한국사연구회, 2008)
「조선중기 사대부의 혼례형태: 가관친영례의 시행을 중심으로」(장병인, 『조선시대사학보』 45, 조선시대사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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