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의 혼례에서 별궁친영(別宮親迎)이 시행된 것은 인조와 장렬왕후의 혼인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초기에는 ‘명사봉영(命使奉迎)’의 혼인절차를 취하다가, 중종년간 ‘가관친영(假館親迎)’의 절차를 거친 후, 별궁친영이 새로운 혼인절차로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명사봉영’은 국왕의 존귀함을 과시하기 위하여 사신을 보내 신부를 맞아오도록 한 절차이고, ‘가관친영’은 국왕의 혼인에 친영을 택하면서도 국왕이 직접 신부를 맞으러 개인집으로 가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 하여 사신이 신부를 관소까지 맞아오도록 한 친영절차의 한 유형이다. ‘가관친영’은 전안례(奠鴈禮)와 관소까지 왕비를 맞아오는 절차를 사신으로 대행케 했다는 점에서 아직 ‘명사봉영’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반해 ‘별궁친영’은 ‘고례(古禮)’의 6례에서의 친영(이하 ‘진친영(眞親迎)’)과 가장 유사한 친영절차의 한 유형이다. 다만 신부를 신부집에 가서 맞아오지 않고 별궁에서 맞아온다는 사실만 다를 뿐이다. 인조는 병자호란으로 인해 파괴된 태평관을 수리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관소로부터 왕비를 친영해 오는 가관친영의 절차 대신 왕비가 거주하고 있는 별궁에서 직접 친영함으로써 일반 사대부의 친영례와 유사한 예법을 선택했다. 서인의 득세와 ‘천하동례(天下同禮)’ 적용의 흐름 속에 사대부가 추구하던 ‘진친영’과 좀더 유사한 형태인 별궁친영이 탄생된 것이다. 별궁친영은 이후 확고히 정착하여 조선왕실 특유의 최종적 귀결책이 되었다. 인조 이후 9차례의 국왕혼례는 모두 별궁친영의 형태를 취하였다.
별궁친영은 관리로 하여금 왕비(세자빈)의 거주지를 별궁으로 옮기게 하여<그림-①> 삼간택 직후부터 왕비(세자빈)가 상당기간 그곳에서 생활하게 한 후<그림-②>, 왕(왕세자)이 별궁에서 직접 전안례를 치르고 왕비(세자빈)를 맞아 궁궐로 돌아와<그림-③> 궁궐에서 혼례를 치르는<그림-④> 친영절차의 한 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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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궁을 운영한 주된 목적은 간택절차를 마친 왕비·세자빈 등의 예비신부를 원래 가족과 분리시켜 왕실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위엄을 세울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다. 별궁은 왕족의 집을 임시로 빌려 마련하였는데, 일반 개인집에서 진행하기 어려운 성대한 행사를 순조롭게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마련된 별궁은 삼간택 직후에 왕비나 세자빈이 이곳에 머물며 기본적인 유교 소양을 익히거나 궁궐생활을 위한 예의범절을 배우는 신부수업을 행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왕비나 세자빈의 경우 통상 40∼50일 정도 별궁생활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별궁으로 활용된 궁가로는 이현궁·향교동궁·어의동궁·운현궁·안동별궁 등이 있는데, 왕비나 세자빈의 혼례는 주로 어의동궁에서 진행되었다. 별궁의 위치는 주로 창덕궁을 중심에 두고 주위에 포진해 있는 형상을 띠었다. 별궁에서 신부를 맞아 궁궐로 돌아와 행할 혼례식을 위해 궁궐과 가까운 위치의 궁가가 선호되었던 때문이다.
가관친영 절차에서 ‘관소’는 국왕이 신부를 직접 맞이하는 친영의 절차를 수행하기 위해 지정한 공가(公家)였다. 이에 반해 ‘별궁’은 사사로운 개인집이 아닌 궁가(宮家)라는 ‘공가’의 성격을 띠고 있으면서도 왕비가 일정기간 거주하며 신부로서의 준비를 하는 ‘사가(私家)’로서의 성격을 함께 띠었기 때문에, ‘신랑이 신부집에서 신부를 몸소 맞아와 혼례를 치른다’는 ‘친영’ 본래의 성격에 좀더 부합하였다. 결과적으로 별궁은 왕비로 하여금 왕실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위엄을 견지할 수 있게 하였을 뿐 아니라, 친영 본래의 의미를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었다. 동시에 왕이 왕비를 맞으러 개인집으로 갔을 때 일어날 수 있는 국왕체모의 손상을 막을 수 있는 일거양득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별궁친영은 국왕의 혼인에 관소 대신 의제적 왕비집인 별궁을 이용하게 함으로써 사서인의 혼례방식과 마찬가지인 ‘진친영’의 형식에 가깝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사사로운 개인집이 아닌 궁가를 이용하여 별궁의 공적 역할을 부각시킴으로써 끝내 국왕혼례의 독자성을 유지케 하였다. 즉 별궁친영은 ‘진친영’으로의 이행과 국왕혼례의 독자성이라는 양면성을 모두 갖춘 절묘한 타협책으로 마련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