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봉운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조선여성동우회, 신간회, 근우회 등에서 활동하며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전개한 교육자 ·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899년(고종 36)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경상남도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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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조선여성동우회, 신간회, 근우회 등에서 활동하며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전개한 교육자 · 독립운동가.
개설

1889년 경상남도 김해에서 출생하였다. 서울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를 졸업하고, 국내 및 해외에서 여성교육활동에 종사하였다. 이후 불교를 신앙하게 되어 불교여성운동 및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 활약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 교육운동

대구의 기독교 장로교계 학교인 계성학교(啓聖學校) 교사로 3년간 재직하였다, 교사인 기태진(奇泰鎭, 이명 기석호(奇昔湖, 奇石虎))과 결혼한 후 1910년대 초 북간도(北間島)로 망명하여 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 동포학교 등지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동시에 간도애국부인회 회장으로 간도와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비밀단체인 철혈광복단 여자단원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부인독립단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 사회운동

1922년 4월경에 창립된 조선불교여자청년회 회장으로서, 그해 9월에 개교한 능인여자학원의 교장을 역임하였다. 1923년 3월 24일부터 1주일간 전조선청년당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에 참가 대표로 선출되었다. 1924년 4월 12일 개최한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고, 삼국[한인(韓人), 만인(滿人), 로인(露人)]부인전도회에도 참여하였으며, 반도여자학원을 경영하였다.

1924년 5월 창립된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에 발기 단계부터 참여하여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로 활동하였다. 또 북풍회(北風會)와 연결되는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1925년 1월 21일 발기총회를 개최한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의 창립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는데, 창립총회에서 축사하다가 경관의 제지를 받았다. 1927년에는 2월에 창립된 신간회(新幹會) 및 5월에 창립된 근우회(槿友會)에 참여, 활동하였다. 1927년 4월 26일 근우회 발기 당시의 중앙집행위원과 중앙검사위원, 전국대회 접대부 책임자 등을 역임하였다. 군위지회 설립 지원을 위해 파견되었으며, 근우회 청진지회 집행위원, 경성지회 대의원 등에 선임되었다. 1929년 8월에 조직된 경성여자소비조합에도 참여하였다. 1931년 근우회 내부에서 운동의 방향과 관련해 근우회 해소론이 등장하였다. 우봉운은 ‘앞으로 여성운동은 근우회가 아니라 급진적이고 좌익적인 여성노동운동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좌우익을 망라한 여성단체였던 근우회는 1931년 해소되었다.

또한 사랑에 대한 국제결혼은 당연히 허용되어야 하지만 일제가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한 일본인과 조선인의 결혼에 대해서는 ‘국가 간의 정략결혼’이라고 비판했다. 나아가 여성이 사회운동을 잘하기 위해서는 애인이나 가정에 속박당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여성의 독신을 강조하였다. 1930년대 후반에는 주로 신문, 잡지 등 언론활동을 통해 여성운동을 전개하였다.

  1. 해방 후 운동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성시 인민위원 중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으며, 1948년 1월 9일에는 민족자주연맹 제2차 상무위원회에서 부녀부장으로 선임되었다. 동년 4월 15일 민주독립당 상무집행위원회의 각 부서 개편에서는 부녀위원회의 대표가 되었다. 1948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한 대표 30여 명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후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한국근대 여성 32인의 초상』(김경일 외 지음, 한국학중영연구원 출판부, 2014)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박용옥, 지식산업사, 1996)
「조선불교여자청년회의 창립과 변천」(김광식, 『한국근현대사연구』 7, 한국근현대사연구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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