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이일정은 일제강점기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하는 등 남편 이준과 함께 반일운동 및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876년 출생하여 1935년 사망했다. 이준의 후처 또는 첩으로 알려져 있다. 1905년 봄 서울 안현동(지금 안국동 일대)에 한국 최초의 '부인상점'을 개업해 1910년경까지 운영하였다. 기독교인이면서 신교육을 받았던 이일정은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언론을 통해 자신의 시국인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1907년 헤이그로 파견된 이준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하얼빈,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남편의 시신을 찾았지만 별 성과 없이 돌아왔다.
정의
일제강점기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하는 등 남편 이준과 함께 반일운동 및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개설
생애
활동사항
기독교인이면서 신교육을 받았던 이일정은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언론을 통해 자신의 시국인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1904년 12월에 공진회 회장이었던 이준이 정부 대신들을 비판하다 체포당하자 대책모임에 나가 연설을 하고 『황성신문』에 투고하여 공진회 탄압의 부당성을 알렸다. 1907년 2월에는 일진회(一進會)로부터 학비를 조달받지 못해 단지(斷指)동맹을 한 일본유학생들의 소식을 듣고 『대한매일신보』에 국권회복의 목적을 위해 유학생들을 도와야한다는 투고문을 싣고 기부금을 보냈다. 1907년에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서울 종로 대안동 고 판서(故判書) 김규홍(金圭弘)의 집에 임시사무소를 두고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하였다. 1907년 9월에는 『제국신문』의 폐간 소식을 듣고 신문 폐간은 곧 '이천만인의 귀와 눈이 없어지는 것'라는 투고문을 싣기도 하였다.
1907년 4월 헤이그로 파견된 이준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이일정은 광동학교 교감 일을 몇 달 만에 접고, 대외활동도 줄였다. 3년 후인 1910년에는 남편의 시신이라도 찾고자 중국 하얼빈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헤맸지만, 성과 없이 혼자 돌아왔다. 이때 함께 여행을 하였던 이준 전처의 아들인 이종승(李鍾乘)은 중국으로 가서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절강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상해 임시정부의 동로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북간도에서 항일무장운동을 전개하였던 이용(李鏞)이 바로 이종승이다.
참고문헌
- 「근대계몽기 첩 출신 계몽운동가들: 신소당과 이일정」(홍인숙, 『이화어문논집』 40, 이화여대 한국어문학연구소, 2016)
- 「부인상점으로 여성자립실천: 최초의 부인상점 주인 이일정」(최은희, 『추계 최은희 전집 4: 한국개화여성열전』, 추계최은희문화사업회, 1991)
- 「부인상점」(『황성신문』, 1905.6.16)
- 「해아밀사(海牙密使) 이준씨 미망인 이일정여사 방문기」(『신동아』, 19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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