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은 1865년 10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노르망디 계통인 샤를르 이지도르 쿠랑(Charles Isidore Courant, 18261888)과 파리 출신인 마리 코스나르(Marie Cosnard, 18351907)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83년, 대학입학자격고사에 합격하고 같은 해 파리대학 법대에 입학하여 1886년에 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또한 1885년에는 파리 동양어학교(L’Ecole des Langues Orientales Vivantes)에 등록하여 중국어와 일본어를 공부했으며 1888년에 고등교육학위(Diplôme)를 받았다. 1913년에는 리옹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3년 쿠랑은 과로로 강의를 중단하고 남부 지방에서 장기 휴가를 보낸 후 다시 강의를 시작하지만, 1934년 초 뇌출혈을 일으킨 후 투병 끝에 1935년 8월 18일에 사망하였다.
모리스 쿠랑은 1888년 9월부터 1890년 5월까지 중국 북경의 프랑스 공사관 통역관 실습생 자격으로 근무하였다. 이 기간 동안 ‘북경의 궁정(La Cour de péking)’이라는 연구를 수행하였고, 이 연구로 1891년 프랑스 외무성의 통역관상을 수상하였다. 1890년 5월 통역서기관으로 서울로 전속되어 1892년 3월, 21개월의 한국 근무를 마치고 북경으로 떠났다. 1892년 10월, 파리에 돌아온 쿠랑은 같은 해 11월에 동경에 부임하였다. 서울로 부임하는 것을 요청하였으나 1895년부터 텐진[天津]의 영사관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후 통역관으로서의 경력을 포기하고 파리로 돌아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동양학 저술의 목록 작업과 강의 · 연구를 지속하였다. 1913년에는 리옹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고, 1919년에 쿠랑은 일본과의 교육 협력 사업을 위한 학교 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6주간 체류하였다. 이 여행에서 쿠랑은 한국에 와 평양, 서울, 대구에 잠시 머무르며 장서각(藏書閣)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1934년 병으로 중단할 때까지 리옹대학에서 중국어와 함께 한국 문화를 강의하였다.
모리스 쿠랑은 일생 동안 모두 103편의 논저를 남겼으며 1891년 『한국역대행정총람』(Répertoire historique de l'administration coéenne)을 저술하여 1892년 외교관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서울에 부임한 후 당시 주한프랑스공사였던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 18531922)로부터 조선 책들에 대한 목록을 작성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 작업은 쿠랑이 한국 근무를 마치고 떠난 이후에도 한국에 체류하던 뮈텔 주교(Gustave Charles Marie Mutel, 18541933) 등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작업을 지속하였고 1894년, 『한국서지(韓國書誌)』 1권이 간행된 후 1901년 보유판(補遺版)까지 모두 4권으로 완성하였다. 특히 170쪽에 달하는 서문은 다수의 언어로 별도 번역되어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밖에도 쿠랑은 1900년 파리세계박람회에서 한국을 소개하는 『샹 드 마르스의 한국관, 서울의 추억(Le pavillon coréen au Champ-de-Mars, Souvenir de Seoul, Corée』을 비롯하여 한국의 유적 · 음악 · 문자 등 한국에 관한 다양한 주제의 저술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