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는 프랑스의 외교관이며 애서가(愛書家), 미술품 수집가이다. 1887년 초대 주한프랑스 대리공사로 임명되어 한국에 부임한 후 1891년까지 한국에서 근무하였고, 1896년부터 1906년까지 주한프랑스공사 겸 총영사로 일하면서 도자기, 가구, 고지도, 고서, 회화 등 다양한 한국 문화재를 수집하였다.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 18531922)는 1853년 11월 22일 로브(Department de L'Aube)의 메리 쉬르 샌느(Canton de L'Mery sur Seine)에 있는 플랑시(Plancy: 현 플랑시 라바이에(Plancy L'Abbay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쟈크 오귀스트 시몽 콜랭 드 플랑시(Jacques Auguste Simon Collin de Plancy, 17941881)이며 출판과 인쇄 사업을 했다. 아버지 쟈크는 초기에 ‘콜랭 당통(Collin Danton)’이라는 성을 사용했는데 파산 후 벨기에로 떠났다.
1837년 프랑스로 돌아와 고향인 플랑시 마을에 정착하게 되면서 ‘콜랭 드 플랑시’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조르쥬 드 플랑시(Georges de Plancy) 백작의 청원에 의하여 이름을 사칭한 것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 콜랭 드 플랑시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1854년, 가족들은 파리로 이사를 하고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는 파리 동양어학교(L’École des Langues orientales vivantes)에서 공부하여 1877년에 중국어와 법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졸업과 동시에 중국 베이징 소재 주중프랑스공사관의 통역 연수생으로 파견되었고 1883년에 상하이에서 2등 영사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30여 년에 이르는 경력을 쌓은 후 1907년 은퇴하였고 1922년에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는 1887년 5월 프랑스와 조선과의 우호 조약에 대한 비준 서류를 교환하는 업무를 맡게 되면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짧은 체류 이후 1887년 11월에는 최초의 주한프랑스 영사로 임명되어 체류하게 된다. 1890년에는 베이징의 수석 비서관으로, 1891년에는 일본 도쿄의 영사로 임명되어 한국을 떠나 이후 워싱턴, 아테네, 파리, 모로코 탕헤르(Tanger)의 영사를 역임하였다. 1895년에 주한프랑스 공사 겸 총영사로 다시 서울에 와 1906년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조선 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12월 21일 통감부(統監府) 및 이사청(理事廳) 관제(官制)를 공포하고, 초대 통감에 이토 히로부미를 임명한 데 이어 1906년 1월에는 주한일본공사관을 비롯한 각국의 영사관을 철수시킨다. 이때 주한프랑스공사관도 철수되면서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콜랭 드 플랑시는 한국 체류 기간 동안 조선 왕실과 호의적인 외교 관계를 이끌었고 한불 양국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한국의 고서와 도자기 등 여러 문화유산들을 다수 수집하였다. 수집한 고서는 18871891년, 18951899년 두 차례에 걸쳐 모교인 동양어학교에 기증하고 도자기는 프랑스 세브르(Sèvres)의 국립도자박물관(Musée national de Céramique)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에 기증하였다. 1911년 3월에 프랑스 파리의 드루오 경매장에서 콜랭 드 플랑시의 수집품에 대한 경매가 진행되었는데 한국, 중국, 일본의 경매품 883종 중 700종이 한국 문화유산이었다. 수집품으로 유명한 것이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하권이며 불화, 무속화, 고지도, 가구 등도 수집하였다. 이들 자료들은 현재 프랑스 파리의 국립기메동양박물관(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Guimet) 등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