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동우회_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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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동우회는 1926년 안창호가 서울에서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개량주의적 민족운동단체이다. 국내 흥사단 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서울의 수양동맹회와 평양의 동우구락부가 합동하여 결성되었는데 국외에 있는 흥사단과 통합하여 동우회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인격 수양 및 민족의 실력 배양을 표방하는 합법 단체로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을 중견 회원으로 확보하였다. 1937년 기독교계 회원이 전개한 민족운동에 연루되어 지방동우회의 회원이 기소되었다. 1941년 상고심에서는 사건 관련자가 대부분 친일파로 전락하였기에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수양동우회 (修養同友會)
수양동우회는 1926년 안창호가 서울에서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개량주의적 민족운동단체이다. 국내 흥사단 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서울의 수양동맹회와 평양의 동우구락부가 합동하여 결성되었는데 국외에 있는 흥사단과 통합하여 동우회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인격 수양 및 민족의 실력 배양을 표방하는 합법 단체로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을 중견 회원으로 확보하였다. 1937년 기독교계 회원이 전개한 민족운동에 연루되어 지방동우회의 회원이 기소되었다. 1941년 상고심에서는 사건 관련자가 대부분 친일파로 전락하였기에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김약수 (金若水)
김약수는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조선노동총동맹 창설에 참여한 노동운동가, 정치인이다. 1890년 부산 출생으로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이후 건설사(建設社)와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았으나 이듬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좌익노선에서 이탈해 중간파 노선을 취했으며, 정부 수립 후 제헌의원과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출옥하여 월북하였다.
일제강점기 공주 영명학교 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 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외교관,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묘묵 (李卯默)
일제강점기 공주 영명학교 교사, 연희전문학교 교수, 교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외교관, 친일반민족행위자.
일제강점기 때, 동아일보 정주지국장, 임시정부 연락원 등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선우훈 (鮮于燻)
일제강점기 때, 동아일보 정주지국장, 임시정부 연락원 등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학전은 해방 이후 서울시 사회국장, 인천시장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목사, 농촌운동가이다. 1905년 평안남도 안주군 출생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 입학 후 조만식의 지도 아래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3년 일본에서 종교교육과 사회사업을 공부한 후 이듬해 귀국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농사강습회 개최, 농촌지도자 양성, 협동조합·소비조합 결성 등 다양한 농촌운동에 힘썼다.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이듬해 농우회사건으로 체포되었다. 해방 후 서울시 사회국장, 인천시장, 국제인권옹호회 경기도 본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1972년에 사망하였다.
박학전 (朴鶴田)
박학전은 해방 이후 서울시 사회국장, 인천시장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목사, 농촌운동가이다. 1905년 평안남도 안주군 출생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 입학 후 조만식의 지도 아래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3년 일본에서 종교교육과 사회사업을 공부한 후 이듬해 귀국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농사강습회 개최, 농촌지도자 양성, 협동조합·소비조합 결성 등 다양한 농촌운동에 힘썼다.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이듬해 농우회사건으로 체포되었다. 해방 후 서울시 사회국장, 인천시장, 국제인권옹호회 경기도 본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1972년에 사망하였다.
홍난파는 일제강점기 「봉선화」, 「고향의 봄」 등을 작곡한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자, 음악 평론가, 문필가, 편집인이다. 작곡가로서 가곡, 동요, 기악곡, 신민요,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썼고, 특히 100여 곡이 넘는 동요와 17곡의 가곡을 작곡하여 동요 및 가곡 작곡가로서 이름을 남겼다. 또한 홍성유, 이영세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악단인 난파트리오를 결성해 실내악 보급에 힘썼다. 편집자로서 예술지 『삼광』과 음악 잡지 『음악계』를 창간하였으며, 그 외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홍난파 (洪蘭坡)
홍난파는 일제강점기 「봉선화」, 「고향의 봄」 등을 작곡한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자, 음악 평론가, 문필가, 편집인이다. 작곡가로서 가곡, 동요, 기악곡, 신민요,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썼고, 특히 100여 곡이 넘는 동요와 17곡의 가곡을 작곡하여 동요 및 가곡 작곡가로서 이름을 남겼다. 또한 홍성유, 이영세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악단인 난파트리오를 결성해 실내악 보급에 힘썼다. 편집자로서 예술지 『삼광』과 음악 잡지 『음악계』를 창간하였으며, 그 외 소설가로도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