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정주 출신. 호는 정재(定齋). 1909년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에 입학하였다가 1910년 선천 신성학교(信聖學校)로 전학, 2학년 때인 1911년 형 혁(爀)과 함께 105인 사건으로 잡혔으나 무죄 석방되었다.
1914년 졸업 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915년 형과 함께 중국에 망명, 남경 금릉대학(金陵大學) 의학부에서 수학하였다. 1917년부터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독립자금을 조달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33년 귀국하여 동아일보 정주지국장으로 일하는 한편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지방순회강연을 하다가 1935년 피검되었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다시 잡혔으며, 1938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9년 만주국 부의(傅儀)가 압록강 수풍댐의 준공시찰을 하러 왔을 때에도 예비검속을 받았고,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뒤에는 자택연금을 당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조만식(曺晩植) 등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조직하고 평안북도지부 당무위원장으로 활약하다가, 1946년 소련군사령부의 체포령을 피하여 월남하였다.
월남 후 재건된 조선민주당 최고위원, 평안북도민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3년 105인 사건을 회상하며 『민족의 수난―백오의 피눈물―』이란 저서를 간행하였고, 그밖에 『덕수궁의 비밀』이란 저서가 있다.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