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12월 22일 최태용(崔泰瑢)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교회. 최태용은 1897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나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졸업, 연희전문학교의 조교수로 재직중 1919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영향을 받고 열렬한 무교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귀국 후 1925년 6월에 개인잡지 ≪천래지성 天來之聲≫을 창간하여 의식·전례·교회당 등 교회제도에 구속받지 않으며, 하느님의 말씀은 성서에 의해서만 주어지고, 구원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복음주의적인 측면을 신봉하는 무교회주의를 역설하였는데, 그의 이론에는 목사 전계은(全啓殷)의 신령주의와 경건주의신앙이 반영되어 있었다.
≪천래지성≫이 폐간된 뒤, 그는 1929년 6월부터 ≪영(靈)과 진리(眞理)≫를 간행, 그 해 9월부터는 일본 동경에서 계속 간행하면서 일본신학사(日本神學社)에 들어가 근대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무교회주의의 신앙노선을 버리고 기성교회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그의 비판정신과 신학이론 때문에 이단으로 몰려 독자노선을 택하게 되었다.
즉, 그는 1935년 2월에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야 하며,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야 하고, 교회는 조선사람 자신의 교회이어야 한다는 표어를 내걸고, 새로운 교회의 창설을 선언, 교회 이름을 ‘기독교조선복음교회’라고 명명했다.
이어, 1935년 12월 22일에 전국의 ≪영과 진리≫의 독자들을 중심으로 한 신앙동지들과 서울에서 창립예배를 보는 한편, 최태용 자신은 초대 목사 겸 감독으로 취임하였고, 1936년 1월에 총회를 가짐으로써 명실공히 새 교단의 체제를 갖추고, 비로소 한국인 신앙동지들만의 결합으로 이룩된 새로운 교파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때 군산의 백남용(白南鏞)이 최초의 목사로, 문천의 박임하(朴林夏)가 최초의 장로로 임명되고, 김원준(金元俊) 등 11명을 교회대표자로 임명했으며, 1939년에는 이덕봉(李德鳳)이 추가로 장로에 임명되었다.
1974년에 재단법인으로 등록한 기독교대한복음교회는, 이를 계기로 종래의 감독제·이사장제를 총회제도로 개편하고, 현재 총회장·교단임원회·총무·선교부·교육부·교회와 사회부·재정부 등의 기구를 두어 운영하고 있으며, 4개 지방회에 50여 개의 교회, 1만여 명의 신도가 있다.
이 교단이 창설 초기에 이단시된 것은 삼위일체를 부인한 데에도 그 원인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이를 시정하고, 목사 지동식(池東植)이 이사장이던 1966년부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가입하였고, 1978년 복음교회 창립 50주년을 기하여 교세확장과 내실화를 위한 새 전략을 세워 선교활동을 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