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찌무라 간조는 종교개혁을 계승한 개신교는 신자 각자가 어떠한 인간적 중개없이 하나님 앞에 독립·자유한 존재로 직접 서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개신교의 정신이 형식화·제도화되려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제도화된 교회와 성례전을 비판하고 성서와 신앙만을 중시할 것을 주장했다.
‘무교회’라고 하는 단어는 1893년에 간행된 『기독신도의 위로(基督信徒の慰)』의 「제3장:기독교회로부터 버림 받았을 때」에 보이고 있으며, 1901년에는 잡지 『무교회』를 창간하여 「무교회」를 「교회가 없는 자의 교회」라고 말하고 있다. 이 잡지 3호에서 「무교회주의」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무교회주의는 교회의 건물은 물론 성직자의 자격도 성찬 등의 의례도 기독교의 불가결한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신 앞에 단독자로 서서 그를 직접 체험하고 신앙을 생활화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우찌무라 사후에는 무교회주의를 둘러싼 신학적 해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성서 강의와 전도지의 발행을 중심으로 일본과 한국, 타이완에서 집회가 존속되고 있다.
기독교의 형식을 최대한 단순화함으로써 그 정신을 최대한 분명히 하려는 점에 이 운동의 의의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중심이 주변부를 파괴하는 것만으로 자명해 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또 다른 고민이 필요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