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8월 15일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개신교에 입교했다. 명신여학교 졸업을 몇 달 앞두고 평양도립병원 간호원 양성소에 입학해 간호원이 되었다.
청년시절에 한경직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신의주 제2장로교회에 출석했는데, 그 곳에서 배재학당을 거쳐 일본 중앙대학 법과를 졸업한 김창기와 26세 때 결혼했다. 이후 서울에서 성냥공장과 비누공장을 운영했다. 어머니와 자식의 사망 그리고 사업의 실패로 심장병이 발병해 자살을 결심하고 삼각산으로 올라갔으나 삼각산 부흥회에서 예수를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후 순복음 신학교에 입학하여 조용기와 신학교 동창생으로 공부했다. 조용기는 그의 사위이다.
1958년 5월 18일 최자실은 조용기와 함께 오늘날 순복음 교회의 전신인 대조동 천막 교회를 개척해 첫 예배를 드렸고, 1961년 10월 15일 서대문으로 옮겨가 1962년 2월 18일에 순복음중앙교회(현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설립했다. 1968년 신도가 8,000명에 이르자 예배를 3부로 늘리면서 여의도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그리고 여의도 성전 건축이 한창 진행되던 1972년에 그는 오산리에 있던 교회 묘지에서 자주 철야기도를 했다. 그리고 묘지 주변의 땅을 구입해 금식기도를 할 수 있는 기도원을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1973년 3월 7일 순복음오산리기도원(현 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이 완공되었다.
1973년 10월 23일에 여의도 교회의 헌당예배가 드려지고 최자실은 조용기를 도와 교회 사역에 진력했다. 이후 1978년 5월 순복음중앙교회 제28차 정기총회에서 교단 최초로 여목사 인준을 받았다. 조용기 목사가 유럽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동안 최자실은 일본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1978년에는 일본 코오베(神戸) 순복음 극동 신학원을 개원해 원장을 맡았다. 1989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