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에 금강산에 완공된 개신교 수양관으로 1941년 폐쇄되었다. 장로교 수양관이었으나, 개신교 초교파적으로 사용되어 수많은 전국 교역자 수양회를 비롯한 여러 개신교 행사가 개최되었다.
수양관의 설립목적은 교역자들의 몸을 휴양하는 한편 고요한 자연 속에서 기도와 수양의 터전을 마련해 새로운 재충전을 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고, 나아가 금강산을 널리 세계에 알려 세계적 공원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1924년 제13회 장로교 총회에서 수양관 건립이 발의되어 제14회 총회에서 가결되었다. 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한석진 목사, 위원에 함태영·홍종필이 임명되었다. 조선 총독부의 국유임야를 10년 시한부로 대부 받기로 하고, 1926년 금강산 온정리 소재 국유임야 8천여 평 기지에 석조 2층 건물의 건축을 시작했다. 공사기금은 1928년 대구에서 열린 장로교 제17회 총회에서 『한국장로회사기』의 판권을 넘겨받아서 그 판매 이익금을 그 건축비에 쓰기로 했고, 그 외 금액 대부분을 한석진 목사가 전국 교회를 방방곡곡으로 순회하면서 모집했다.
1930년 9월 만물상의 삼선암을 서쪽으로 바라보며 높이 솟은 수정봉 밑에서 동해바다를 눈앞에 내다보는 한하계 골짜기 중앙지대 가장 좋은 위치에 수양관이 준공되었다. 수양관 정초석 속에는 한석진목사 자작·자필의 정초문이 들어있다.
수양관 2층에는 강당과 도서실과 열람실을, 1층에는 식당·주방·침실·오락실을 꾸몄다. 경비의 수입은 총회 부담금 3천원, 그밖에 한석진 목사가 순회하며 모은 기부금 5천여 원으로 외국인의 헌금이 전혀 없는 순수한 조선 개신교인의 헌금으로 완성되었다. 1931년 9월 11일 제20회 장로교총회를 이 수양관에서 개최해 역사적인 헌당식을 거행했다. 명칭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교회나 단체는 누구나 사용하도록 하자고 주장한 함석진 목사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기독교수양관’으로 정해졌다.
수양관은 1931년 9월에 장로회총회가 수양관에서 개최된 이후로 감리교총회 여전도회총회 전국 교역자수양회 등 크고 작은 개신교 관계 집회가 모두 이곳에서 열렸다. 그러나 1938년 10년 기한으로 대부받은 대지 기한 만료되게 되자, 조선 총독부는 지속적 대여를 요망하는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총독부에게 빌려주거나 기부하든지 아니면 철거하라고 했다. 결국 자진 철거가 진행되었고, 초석에 들어있던 한석진목사 자작·자필의 정초문은 현재 기독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