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음력 5월 3일 평안남도 강동군 원탄면 상리마을에서 부친 이원명(李元明)과 모친 이근명(李勤明)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어머니의 손에 끌려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개신교 학교인 평양 광성소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6월에 졸업했다.
1918년 2월 미국 유학의 길을 찾아 상해로 떠났다가 1919년 2월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다. 3·1운동을 경험한 후 1919년 6월 용정으로 가 1922년 7월까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용정감리교회에서 회개 체험을 한 이후 만주지방 감리교선교연회를 관리하던 총리사 양주삼 목사의 권유로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협성신학교에서 변성옥 학감의 민족주의적 영향을 받아 민족교회를 지향하는 토착화 작업에 눈떴다. 1927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감리교회 목회자로 정식 안수를 받았다. 목사가 된 후 그는 용정의 서북편에 있는 두도구(頭道溝)교회로 부임하여 의지할 곳 없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일주일에 세 번 모이는 ‘반일학교’를 세워 청소년교육에 힘썼다.
1933년 6월 평양에서 이용도를 중심으로 예수교회공의회가 창립되었으나, 10월 2일 이용도가 별세하자 이호빈이 그 뒤를 이어 중앙선도원 선도감(宣道監)으로 선출되었다. 이호빈은 그해 11월 1일 중앙선도원 설립 선포식을 거행하고 상무기관을 조직했다.
만주사변 이후 신사참배가 강요되자 이호빈은 1937년 선도감과 평양교회 담임 사임서를 제출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38년 일본 감리교 계통의 교육기관인 관서(關西)신학원에 입학했고, 그후 성화신학교로 옮겨 가 견문을 넓혔다. 1943년에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지만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해방 후 이환신, 이종현, 이호운과 함께 교파 없는 신학교, 평신도를 가르치는 신학교, 그리고 외세의 도움을 받지 않는 자주자립적인 신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1945년 11월 1일 70여 명의 학생들을 모아 중앙신학원(현 강남대학교)을 개원했다. 이 학교는 1948년 8월 12일 우리나라 신학교로는 처음으로 대학령에 의한 4년제 정규대학으로 문교부에서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66년에는 재단 이사장에 취임하고, 1967년 7월 신학교에 신학전공, 사회사업전공, 교회음악전공, 기독교문학전공 등을 포함해 교육체계를 구성하였다. 1989년 8월 20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