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에 파송된 캐나다의 독립선교사 펜윅(M. C. Fenwick)의 전도로 시작되었다. 신약성서를 신앙의 최고 권위로 삼고 그 원리들을 보존하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개인적 신앙고백에 의한 침례만 인정하며, 의식에서는 침수례를 특별히 강조한다.
1889년에 파송된 캐나다의 독립선교사 펜윅은 함경도 오지(奧地)와 간도 지역을 주요 선교지로 삼았다. 이후 선교 영역을 확대해 1906년에는 충청남도 강경에서 대회를 열어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했다.
3·1운동 후 일제가 ‘포교 허가제’를 ‘포교 신고제’로 바꾸자 펜윅은 ‘대한기독교’라는 교명을 1921년 ‘동아기독교(東亞基督敎)’로 바꾸어 등록했다. 그러나 1933년 교회라는 명칭이 세속화되었다는 이유로 ‘동아기독대(東亞基督隊)’로 명칭을 변경했다. 1940년에는 ‘동아기독대’라는 명칭이 천황의 군대에 저항감을 준다고 느낀 일본의 요구로 다시 ‘동아기독교’로 개칭했다. 일제 말기인 1944년 ‘동아기독교’는 성결교, 구세군, 안식교와 함께 일제에 비협조적이고 재림설(再臨說)을 강조한다는 이유로 교단이 해체되었다.
이후 해방되면서 교단이 재건되었으나 원산을 총부(總府)로 하여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남북분단으로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1946년에 감목체제를 회중체제로 바꾸고 임원 명칭도 다른 교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명칭으로 변경하면서 교단 분열이 일어나 10여 개의 교회가 ‘대한기독교회’라는 명칭으로 분립되었다. 한편 ‘동아기독교’는 1949년 충청남도 강경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교명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변경했다. 또한 이 총회를 계기로 ‘대한기독교침례회’는 미국남침례회와 손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초반부터 미국남침례회 선교부의 자금이 유입되자, 선교부와 총회의 정책적 갈등, 타교단 교역자의 무분별한 영입으로 인한 부작용, 총회 내의 여러 파벌, 그리고 한국인과 선교사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1959년 ‘기독교한국침례회’와 ‘한국기독교침례회’라는 두 개의 교단으로 분리되었다. 하지만 1968년 소장파 목사들의 반선교사 운동과 교단주권 회복운동으로 ‘한국침례회연맹’이라는 통합교단이 출범하게 되었다.
그 후 ‘한국침례회연맹’은 1976년에 교명을 다시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독교한국침례회’는 침례교 세계대회를 개최할 정도로 세계에서 주목받는 교단으로 성장했다.
2017년 현재 기독교한국침례회 소속 교회는 3,271개에 이르며, 목사와 전도사를 합한 목회자 수는 6,724명이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 이상으로 성직자 계급주의와 권위주의가 팽배해 간다고 비판받고 있는 현실 앞에서 개인의 영적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만인제사장설(萬人祭司長設)’은 한국 교회의 쇄신을 위한 좋은 자원이 될 수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