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시남(是南). 함경남도 영흥 출신. 청년기에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하여 3년 동안 공부하였으며 이 시기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졸업 후에 연희전문학교 농업실습지도원으로 2년간 근무하며 신앙활동을 계속하다가 1920년 일본에 건너가 동경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곳에서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內村鑑三)에게 사사하면서 성서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때 뜻을 같이한 동지 중에는 『성서조선(聖書朝鮮)』의 김교신(金敎臣)·함석헌(咸錫憲) 등이 있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에 보낸다』라는 소책자를 펴내 일본의 야만정책에 대한 경고를 하고 이듬해인 1924년 귀국하였다.
그 뒤, 기독교창문사에서 발행하던 『신생명(新生命)』에 「제도냐 신앙이냐」·「사업이냐 생명이냐」 등의 글을 발표하면서 기성교회에 대한 개혁의도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1925년 6월『천래지성(天來之聲)』이라는 개인잡지를 발간하여 약 2년간 교회의 개혁과 신앙의 쇄신을 외쳤는데, 창간호에 실은 「조선아 들으라」에서는 “조선교회는 인간이 주인이 되고 세상사조를 영접하기를 마치 창기가 잡놈을 영접하듯 하여 무생명한 해골이 되어버렸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같은 해 12월 YMCA강당에서 「신앙혁명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 때부터 무교회주의와 다른 노선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며 ‘소(小)하고 순(純)한 민족교회’의 형성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다시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가쿠인대학(明治學院大學) 신학부에 들어갔는데, 이때부터 『영과 진리』라는 개인잡지를 내기 시작하여 「기독교 비판의 기준」·「신앙혁명」·「신학상으로 본 조선교회」와 같은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2년 귀국한 뒤에는 ‘조선의 신학, 조선의 신학교’ 설립을 주장하면서 전국순회집회를 열었고, 그를 따르는 동지들과 함께 1935년 1월 기독교조선복음교회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교회는 민족교회운동의 성격이 강하였던 까닭에 일제 말기에 많은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특히 1942년에는 직접 일본에 건너가서 고위지도자들을 만나 조선의 자치정부수립을 강력히 요청하기도 하여 더욱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8·15광복 후에는 민족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오직 기독교신앙만이 새 국가 건설의 초석이 될 것이라는 신념하에서 신생회를 조직하기도 하였으며, 1947년에는 독립촉성국민회의의 총무를 맡기도 하였다.
정부수립 후에는 농민회 부회장, 국민훈련원 원장으로 농촌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50년 9월 11일 서울에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