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청송(靑松). 평안남도 용강 출신.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진남포의 삼숭학교(三崇學校)를 거쳐 1912년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1919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그 뒤에 동대문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여 1년간 시무하면서, 연희전문학교 조교수 및 동창회장직을 겸임하였다. 이무렵 독립선언서를 영역하는 일에 관여하였다는 죄목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얼마간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뒤 중국으로 잠시 망명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와중에서 종교서적을 탐독하며 지냈으며, 1921년 3월『동아일보』에 「인물평정(人物評定)의 표준론(標準論)」을 연재하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하였다.
감리교협성신학교에서 펴내는 『신학세계』의 편집을 맡으면서 신앙 및 역사 교양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특히 세계 위인들의 생애와 사상연구에 심취하여 이 방면에만 10여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또한 1920년대에 와서 전영택(田榮澤)·임영빈(林英彬)·방인근(方仁根)·이은상(李殷相) 등과 함께 기독교문학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 사이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9년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궁정교회·체부동교회를 거쳐 1935년 목회를 사임하고 성서공회관계 일을 보던 중, 1936년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 체이스(Chase, J. T.)와의 만남을 계기로 그리스도의 교회로 옮겼다.
8·15광복 후 미군정청 아놀드 장관의 고문직을 맡은 일이 있으며, 1947년 돈암동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50년 8월 공산군에 의하여 납치된 뒤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1981년 그를 기념하는 최상현목사기념관이 대한기독교신학교 내에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