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지식인들이 많이 있던 도쿄에서는 1919년 2·8독립선언 발표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일제에 의해 구속되었다. 또 일제가 한국 유학생들의 일거일동을 삼엄하게 경계하므로 도쿄에서 대중집회는 당분간 어렵게 되었다. 이에 젊은 지식인들은 한국 노동자들이 비교적 많이 집중해 있는 오사카에서 거사할 계획을 세우고 활동하게 되었다.
그 대표 인물이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 재학 중이던 염상섭이었다. 그는 국내 3·1운동 발발 이후 서둘러서 3월 19일을 기해 오사카 남구(南區) 덴노지공원(天王寺公園)에서 학생과 노동자의 연합으로 대중집회를 열고 독립선언대회를 결행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 달 15일 도쿄 기후역(岐阜驛) 부근 미즈다여관(水田旅館)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 복제하였다. 17일에는 그 자신이 직접 집필한 선언서 백수십매와 격문 10여 통을 오사카 유학생 백봉제(白鳳濟)·이경근(李敬根)과 함께 만들어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았다. 그러나 오사카의 경찰에 탐지되어 이날 오후 8시경 염상섭 이하 23명이 연행됨으로써 이 대회는 좌절되었다.
이 <독립선언서>에서는 우리 한국은 4,300년의 존엄한 역사를 가졌고, 일본은 한국에 뒤지기를 1,000여 년인데, 단지 이 사실로 보아도 조선민족은 일본민족과 하등 서로 관련된 바 없음을 주장하였다.
한편, 주저함이 없어 목숨을 바쳐 독립을 선언한다고는 했으나 독립쟁취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 선언서의 특징으로는 해외재류노동자들의 독립선언서인 점, 대표자 한 사람의 이름으로 선포한 점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