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부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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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여는 고려전기 「보현십원가」, 『수현방궤기』, 『공목장기』 등을 저술한 승려이다. 923년(태조 6)에 태어나 973년(광종 24)에 사망했다. 경전의 해석과 강설에 뛰어났으며 남악·북악 두 파로 갈라진 화엄종을 하나로 통일했다. 화엄을 처음 전한 의상을 이어 교풍을 바로잡고 교세를 떨친 화엄의 거장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고 제자가 3000인에 이르렀다. 광종이 그를 위해 창건한 귀법사에서 주지로 있으면서 민중을 교화하고 불법을 펴다가 973년에 입적했다. 불교 이외의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고 향가를 지어 국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균여 (均如)
균여는 고려전기 「보현십원가」, 『수현방궤기』, 『공목장기』 등을 저술한 승려이다. 923년(태조 6)에 태어나 973년(광종 24)에 사망했다. 경전의 해석과 강설에 뛰어났으며 남악·북악 두 파로 갈라진 화엄종을 하나로 통일했다. 화엄을 처음 전한 의상을 이어 교풍을 바로잡고 교세를 떨친 화엄의 거장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고 제자가 3000인에 이르렀다. 광종이 그를 위해 창건한 귀법사에서 주지로 있으면서 민중을 교화하고 불법을 펴다가 973년에 입적했다. 불교 이외의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고 향가를 지어 국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김익두는 일제강점기에, 개신교 부흥사로서 큰 업적을 남긴 평양신학교 출신의 개신교 목사이다.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재령과 신천 등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교역을 감당했으며, 신유를 행하는 부흥사로서 당시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한국인들에게 큰 위안과 소망을 주었다. 초기 한국 개신교의 확장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해방 후 북한 지역 교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감당했다. 신천교회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던 중 패퇴하던 인민군에 의하여 순교하였다.
김익두 (金益斗)
김익두는 일제강점기에, 개신교 부흥사로서 큰 업적을 남긴 평양신학교 출신의 개신교 목사이다.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재령과 신천 등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교역을 감당했으며, 신유를 행하는 부흥사로서 당시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한국인들에게 큰 위안과 소망을 주었다. 초기 한국 개신교의 확장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해방 후 북한 지역 교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감당했다. 신천교회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던 중 패퇴하던 인민군에 의하여 순교하였다.
김종우는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의 초기 부흥사로 기독교조선감리회 3대 감독을 역임한 목사이다. 1901년 9월 세례를 받고 1907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신교육을 접했다. 은혜의 체험으로 훗날 유명한 부흥사와 목회자로 성공하였다. 정동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할 정도로 목회 실력과 설교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1938년 10월 기독교조선감리회 제3대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전체 조선감리교회의 행정을 맡은 책임자로 감독직을 수행하였으며, 부흥회를 계속 인도하면서 감리교를 영적으로 크게 부흥시켰다.
김종우 (金鍾宇)
김종우는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의 초기 부흥사로 기독교조선감리회 3대 감독을 역임한 목사이다. 1901년 9월 세례를 받고 1907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신교육을 접했다. 은혜의 체험으로 훗날 유명한 부흥사와 목회자로 성공하였다. 정동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할 정도로 목회 실력과 설교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1938년 10월 기독교조선감리회 제3대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전체 조선감리교회의 행정을 맡은 책임자로 감독직을 수행하였으며, 부흥회를 계속 인도하면서 감리교를 영적으로 크게 부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