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한일국교정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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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항쟁은 1964년 6월 3일에 일어난 한일회담 반대시위와 관련된 일련의 항쟁이다. 이승만과 달리 의욕에 찬 경제건설을 구상했던 박정희는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해 1964년 3월 한일회담 재개를 결정했다. 야당과 사회단체는 매국외교 중지, 일본의 경제적 식민지화 반대 등을 주장하며 회담을 반대했다. 3월 24일 서울시내 각 대학에서 시작된 반대시위는 6월 3일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정부 탄압으로 계엄이 선포된 55일 동안 구속된 수는 총 348명에 이르렀다. 6·3항쟁은 이후 한일협정비준서 조인 때까지 한일협정반대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6·3항쟁 (六三抗爭)
6·3항쟁은 1964년 6월 3일에 일어난 한일회담 반대시위와 관련된 일련의 항쟁이다. 이승만과 달리 의욕에 찬 경제건설을 구상했던 박정희는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해 1964년 3월 한일회담 재개를 결정했다. 야당과 사회단체는 매국외교 중지, 일본의 경제적 식민지화 반대 등을 주장하며 회담을 반대했다. 3월 24일 서울시내 각 대학에서 시작된 반대시위는 6월 3일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정부 탄압으로 계엄이 선포된 55일 동안 구속된 수는 총 348명에 이르렀다. 6·3항쟁은 이후 한일협정비준서 조인 때까지 한일협정반대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62년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 중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일본의 오히라 외상 간에 작성한 문서. 메모.
김종필-오히라 메모 (金鍾泌-大平 memo)
1962년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 중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일본의 오히라 외상 간에 작성한 문서. 메모.
홍순칠 외 32명의 대한민국제대장병보도회 및 대한상이용사회 울릉군 분회 주민들이 독도를 방위하고자 자발적으로 결사·조직한 민간인 경비대.
독도의용수비대 (獨島義勇守備隊)
홍순칠 외 32명의 대한민국제대장병보도회 및 대한상이용사회 울릉군 분회 주민들이 독도를 방위하고자 자발적으로 결사·조직한 민간인 경비대.
주일본 대사, 외무부장관 등을 역임한 외교관·정치인.
김동조 (金東祚)
주일본 대사, 외무부장관 등을 역임한 외교관·정치인.
한일협력위원회는 1969년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협력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발족한 민간기구이다.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두 나라의 현안문제를 논의하는 강력한 협력체제의 필요성에 따라 설립되었다. 창립총회와 제1회 합동위원회는 도쿄에서 개최되었는데, 정계·재계·학계·문화계의 유력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현안문제를 구체적으로 시정하거나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1970년 중국 저우언라이의 ‘4원칙’이 발표된 것을 계기로 점차 그 존재가 약화되었다.
한일협력위원회 (韓日協力委員會)
한일협력위원회는 1969년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협력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발족한 민간기구이다.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두 나라의 현안문제를 논의하는 강력한 협력체제의 필요성에 따라 설립되었다. 창립총회와 제1회 합동위원회는 도쿄에서 개최되었는데, 정계·재계·학계·문화계의 유력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현안문제를 구체적으로 시정하거나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1970년 중국 저우언라이의 ‘4원칙’이 발표된 것을 계기로 점차 그 존재가 약화되었다.
대일청구권자금은 1965년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식민지배라는 한국과 일본의 어두운 과거사를 청산하는 의미로 한국이 일본에게서 받은 무상 3억 달러 및 공공차관 2억 달러 자금이다.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에 의해 한국은 일본에게서 무상 3억 달러 및 공공차관 2억 달러를 받았는데, 외자 도입이 쉽지 않았던 1960년대 한국의 경제개발에 큰 도움이 되었다.
대일청구권자금 (對日請求權資金)
대일청구권자금은 1965년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식민지배라는 한국과 일본의 어두운 과거사를 청산하는 의미로 한국이 일본에게서 받은 무상 3억 달러 및 공공차관 2억 달러 자금이다.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에 의해 한국은 일본에게서 무상 3억 달러 및 공공차관 2억 달러를 받았는데, 외자 도입이 쉽지 않았던 1960년대 한국의 경제개발에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