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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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 학림리 최씨종가 중 가묘 정면
경남 고성 학림리 최씨종가 중 가묘 정면
가족
개념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고조 이하의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던 집안의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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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고조 이하의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던 집안의 사당.
내용

가묘는 유교의 가례 중 특히 제례를 수행하던 곳으로서, 그 성립은 고려 말에 전래된 주자학의 보급과 관련된다. 즉, 고려 말기의 주자학자 정몽주(鄭夢周) 등이 이의 설립을 제창하자 1390년(공양왕 2) 2월에 사대부 집안의 제의(祭儀)를 반행(頒行)하여 적장자손주제(嫡長子孫主祭)의 원칙을 밝혔고, 기일예의식(忌日禮儀式)을 주희의 ≪가례≫에 입각하여 행하도록 하였으며, 1391년 6월에는 가묘제도의 실행을 국내에 명하였다.

그러나 그 시행이 본격화된 것은 주자학을 국가정교(國家政敎)의 근본으로 삼은 조선시대부터이다. 특히, 문물제도의 완비에 힘쓴 세종 때에는 가묘제를 비롯한 가례를 민풍돈후책(民風敦厚策)과 자제훈육의 방법으로 이용하였고, ≪경국대전≫에는 문무관 6품 이상은 3대를, 7품 이하는 2대를, 서인들은 할아버지·할머니만을 제사지내도록 명시하였다.

사대부들 가운데 경제적으로 유족한 사람들은 가묘에 토지와 노비를 영구히 소속시키고 별실을 지어 재욕(齋浴)과 장물(藏物)의 장소로 삼았다. 반면에 가묘를 설치하지 않은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문책을 당하기도 했다. 선조 이후로 접어들면서 가묘의 설치는 사대부 양반층들에게 일반화되었는데, 그것은 곧 이들 사이에 유교적 윤리관념이 일반화되었음을 뜻한다.

가묘는 정침(正寢)의 동쪽에 위치하며 3칸에 오가옥(五架屋)으로 지어져 있다. 안의 마루는 전돌이나 나무판으로 깔려 있다.

그리고 중간 시렁 밑에 문을 내어 중문으로 삼고, 매 칸마다 앞 시렁 밑에는 네 개의 쪽문을 두어 열고 닫을 수 있게 하였는데 분합문(分闔門)이라고도 하였다. 문밖에는 섬돌 둘이 있는데, 동쪽의 것을 조계(阼階)라 하고 서쪽의 것을 서계(西階)라 하며 모두 3계단으로 되어 있다.

섬돌 앞에는 집안사람들이 서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서립옥(序立屋)이 있다. 서립옥의 동쪽에는 3칸으로 된 주고(廚庫)가 서향으로 세워져 있어 여기에다 유서·의물(衣物)·제기 등을 보관해 두며, 한 칸은 신주(神廚)로 삼아 제수를 준비하는 곳으로 쓴다.

집이 가난하여 한 칸의 사당만을 짓고 주고를 세우지 못한 경우에는 대궤(大櫃)를 두 개 만들어 사당 안의 동서 양쪽 벽 아래에 각각 두고, 서쪽의 대궤에는 유서와 의물을 보관하고 동쪽의 대궤에는 제기를 보관한다. 사당과 주고의 주위에는 담이 둘러져 있고 그 앞쪽에는 사당의 중문과 마주보는 외문이 있다.

사당 안에는 북쪽의 시렁에 네 개의 감실(龕室)이 있다. 감실마다 탁자가 있고 그 위에 주독(主櫝)이 있는데, 주독 속에는 신주가 있다.

신주는 고조고비(高祖考妣)부터 고비(考妣)의 순서로 서쪽부터 차례로 모셔져 있다. 감실 밖에는 각각 작은 발이 내려져 있고 그 발 밖의 사당 가운데에는 향탁(香卓)이 놓여 있다. 향탁 위에는 동쪽에 향합, 서쪽에 향로를 놓아둔다.

일각문(一角門)은 네 개의 방주(方柱)로 된 것이 보통이고 널빤지 문짝을 달지만, 때로는 기둥을 여섯 개 세워 가운데 기둥에다 문짝을 달기도 한다. 일각문을 삼문(三門)으로 꾸민 예도 있다.

경상북도 봉화군의 성씨(成氏) 집안 가묘의 삼문은 기둥 넷을 세우고 그 기둥의 측면칸 좌우와 후면에 각각 문얼굴을 내어 문짝을 단 것이다.

일각문과 삼문은 대부분 맞배지붕 형상으로 별다른 치장 없이 소박하게 꾸며져 있으며, 홑처마로서 막새기와는 없고 연등천장을 한 구조이다. 담장은 토담이나 맞담이 보편적이고 기와를 이어 정리하는데, 강회를 사용하거나 꽃담을 꾸민 예는 없다. 앞서 사당은 정면 3칸으로 구성된다고 하였으나, 그 구성은 지역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툇간을 두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툇간을 두지 않는 경우이다. 툇간이 있는 경우는 문묘의 대성전처럼 앞퇴를 두고 그것을 전면 개방한 형태가 된다.

이 경우 측면은 한 칸 반이 된다. 툇간은 맨바닥의 토상(土床)이며 월대와 같은 높이를 유지한다. 툇간의 퇴기둥은 살주이며 보통은 둥구리기둥이다.

내진의 기둥은 네모난 기둥이며 문얼굴 좌우에는 토벽을 친다. 내진의 기둥은 보통 고주가 된다. 문짝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띠살무늬의 분합문이고 다른 하나는 판자로 짠 골판문으로서 후자가 원형이다.

골판문 윗부분은 태극무늬를 투각하여 혼유공(魂遊孔)을 삼는다. 사당 내부는 원래 맨바닥 그대로였거나 포전(舖塼)한 것이었는데, 마루가 보급되면서 우물마루 등이 채택되었다. 천장은 보통 연등이다.

툇간이 없는 경우는 문얼굴이 전면의 평주간에 설치되며 문얼굴 좌우의 벽이 판벽(板壁)이 된다. 이러한 경우의 기둥은 네모진 방주가 어울린다. 전면이 판벽이라도 측면벽과 뒷벽은 토벽인 것이 보통이고 두꺼운 반담이나 화방벽을 쌓기도 한다. 문짝은 골판문이 대부분이며 천장은 역시 연등이다. 여염집에서의 다른 건물들은 모두 단청이 금지되어 있지만 가묘에 대해서만은 채색 치장이 허용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묘는 단청되어 있지 않다. 가묘는 보통 한 집에 한 채이나 때로는 별묘(別廟)라고 하여 작은 규모의 사당이 더 있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가묘는 이상과 같은 독립된 건축물이지만 가난한 사대부나 종자의 집에서는 간혹 깨끗한 방 한 칸을 사용하여 이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안동시 예안면에서 조사된 한 예를 보면 골방에 가묘를 설치하고 북쪽 벽에는 감실을 벽장처럼 꾸며 제사 때에는 미닫이를 열어 신주(神主)가 보이도록 하였다.

산청군 단성면에서 조사된 예에서는 사랑채의 대청 뒤 벽면을 이용하여 뒷벽을 막아 고미다락처럼 꾸며 신주를 모셨는데, 제사 때에는 널빤지로 만든 앞문을 젖히면 제사상처럼 되도록 하였다. 청도군에서는 대청 뒤로 개흘레 형태의 감실을 만들고 그곳에 신주를 모신 예도 있다.

가묘와 관련된 의식들은 제례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알례(晨謁禮)·출입례(出入禮)·참례(參禮)·천신례(薦新禮)·고유례(告由禮) 등이 있다. 신알례는 주인이 새벽에 일어나 사당의 외문 안에 들어가 두 섬돌 중간의 향탁에 분향하고 두 번 절하는 것을 말한다. 출입례는 주인이나 주부가 바깥출입을 할 때 사당에 아뢰는 것을 말한다. 외출기간의 길고 짧음에 따라 형식도 달라진다.

참례는 정조(正朝)·동지·초하루·보름에 사당에 지내는 제사이다. 천신례는 청명·한식·중양 등의 명절 때 절식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지방에 따라 때에 맞게 만든 음식이나 명절에 해먹는 음식을 큰 접시에 담아서 제찬(祭饌)이나 실과(實果) 사이에 차린다.

고유례는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사당에 고하는 것을 말한다. 돌아가신 조상에게 추증(追贈: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죽은 부·조부·증조부에게 官位를 내림)이 되면 그에 해당되는 감실에 대해서만 고하고 특별히 향탁을 그 앞에 설치한다.

적장자를 낳았을 때는 아이를 낳은 지 만 3개월이 되면 앞의 예와 마찬가지로 사당에 고한다. 종자(宗子)가 벼슬을 제수받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밖에 죽은 부모의 생일을 맞았을 때, 늙어서 집안일을 아들에게 위탁할 때, 사당을 수리할 때, 집을 옮기게 되었을 때에 각각 고유례를 행한다.

가묘에 새로 신주를 모시게 되는 것은 대상을 치르고 난 뒤의 일이다. 길제(吉祭)를 지내기 전에 이전의 신주들을 개조하고, 길제를 지낸 뒤 대가 지난 신주를 천조(遷祧)하고 새 신주를 정해진 자리에 모신다. 후손이 없는 방계친의 신주는 정해진 자리의 감실에 차례로 부주(祔主)한다.

가지고 있는 밭의 20분의 1씩을 매 감실 몫으로 떼어 제전(祭田)으로 삼고 거기에서 얻어지는 소득으로 제사의 비용을 충당한다. 그 뒤 4대가 지나면 묘전(墓田)으로 삼는다.

수해나 화재가 났을 때, 그리고 도둑이 들었을 때에는 제일 먼저 사당을 구한다.

신주와 유서를 옮기고 난 다음 제기를 옮기며, 가재(家財)는 그 다음에 옮긴다. 사당이 불에 탔을 경우에는 3일 동안 곡을 한다고 하며, 신주가 불에 타버렸을 때에는 새로 만들어 모신 다음 분향하여 고제(告祭)를 올린다고 한다.

참고문헌

『사례편람(四禮便覽)』
『가례증해(家禮增解)』
『한국민속대관』1(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0)
「조선사묘발생에 대한 일고찰」(류홍렬, 『진단학보』 5,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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