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원군 ()

관북지도 / 온성, 경원
관북지도 / 온성, 경원
인문지리
지명
함경북도 북단에 있는 군.
정의
함경북도 북단에 있는 군.
개관

동쪽은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 동북 지방의 송강성(松江省 : 현재의 吉林省)에 접하고, 서쪽은 종성군, 남쪽은 경흥군, 북쪽은 우리 나라 최북단에 있는 온성군에 접하고 있다.

동경 130°∼130°25′, 북위 42°23′∼42°50′에 위치하며, 면적 856.98㎢(1944년 현재), 인구 5만 1110명(1944년 현재)이다. 6개 면 61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경원면 성내동이다.

자연환경

지세는 함경산맥(咸鏡山脈)의 여맥이 이 군의 서쪽에까지 뻗어 있고, 두만강(豆滿江)에 접하고 있는 동쪽은 낮아 서고동저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서쪽의 종성군과의 군계에 증산(甑山, 1,041m)·동경산(東京山, 632m)·송진산(松眞山, 1,146m) 등이 있으며, 군내에는 탑향산(塔香山, 827m)·운무령(雲霧嶺, 670m)·혜아산(惠我山, 417m) 등이 있다. 하천은 두만강과 그 지류인 송천(松川)·회천(會川)·농포천(農圃川)·오룡천(五龍川) 등이 있으며, 강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특히, 경원면 하면동과 안농면 신개동 일대의 두만강 연안에는 넓은 범람원과 하적호(河跡湖)가 발달되어 있으며, 하중도(河中島)와 하안 단구도 형성되어 있다.

지질은 평안계의 사동통(寺洞統)이 넓게 분포되어 있으며, 두만강 연안 일대는 화강암이 점재한다. 하천 유역 일대의 토양은 주로 사양토이며, 그 밖의 지역은 부식의 함량이 비교적 많은 식양토이다.

기후는 한랭한 대륙성 기후 지역으로서 한서의 차가 매우 심하며, 연평균 기온 5.7℃, 1월 평균 기온 -10.6℃, 8월 평균 기온 22.2℃이며, 연 강수량은 608.8㎜로 비교적 적은 편이다. 서리는 10월 초순경에 내리며, 특히 봄철에는 서북풍이 심하게 불기 때문에 황사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역사

[고 대]

경원군 내에서는 아직 석기 시대의 유적·유물이 조사된 바는 없으나, 두만강에 연한 웅기(雄基)·종성(鍾城)·경흥(慶興) 등지에서 구석기 시대의 포유동물 화석 및 세석기·골각기 등의 유물과 신석기 시대의 조개더미 주거지 등이 발굴된 것으로 미루어, 이곳에는 적어도 신석기 시대 이래로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이 지역은 북방 시베리아 및 만주의 신석기 문화와 청동기 문화가 유입되는 통로에 위치하고 있어서 새로운 유적의 발굴 가능성이 높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옛날 숙신(肅愼)·읍루(挹婁)·예맥(濊貊)·부여(夫餘)·말갈(靺鞨) 등의 부족 국가가 있던 곳이며,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세력권이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唐)나라가 한때 이곳을 지배한 적이 있으며, 발해 시대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해 있었다.

[고 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건국 당시 이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으며,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거란의 영역이 되었다. 말갈의 한 부족인 여진(女眞)이 금(金)나라를 건국하였을 때는 그 지배하에 있었다.

1234년(고종 21) 원(元)나라가 금나라를 멸한 뒤에는 원나라의 강역이 되었다가 1368년(공민왕 17) 원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명나라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처럼 이 지역은 주로 북방 유목 민족의 활동 무대였다.

특히, 금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여진족이 백두산 동북쪽에서 할거하였고, 점차 함경도 지방까지 남하하여 고려와 자주 충돌을 일으켰다.

고려 말기 이 지방이 아직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을 무렵 조선태조의 고조인 이안사(李安社 : 穆祖로 추존)는 원나라에 출사하여 두만강 하구 알동(斡東) 지방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어 여진을 다스렸으며, 한때 경원 용당(龍堂)의 동림고성(東林古城)에 머물렀고, 그 아들 행리(行里 : 翼祖로 추존) 또한 이곳의 천호(千戶)를 지냈다.

원나라가 멸망하자 두만강 최하류 지방까지 고려의 세력이 확장됨에 따라 경원은 지금의 경흥군을 합쳐 공주(孔州 : 일명 匡州·楸城)라 불렀다.

[조 선]

1398년(태조 7) 정도전(鄭道傳)이 동북면의 행정 구역을 정할 때 이곳에 목조와 그 비의 능인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있고, 조선 건국의 성지라 하여 이름을 ‘경원’이라 하고 부(府)를 두어 경성·용성(龍城)에서 두만강 하류에 이르는 지역을 그 관할하에 두었다.

그런데 1409년(태종 9) 치소를 고성에서 소다로(蘇多老 : 용당 부근)로 옮기자 이듬해 변경의 여진이 쳐들어와 백성들을 경성으로 이사하게 하고, 경원군의 치소를 경성에 병설하는 동시에 덕릉·안릉도 함경남도 신흥군으로 이장하였다.

그 뒤 1417년 지금의 부령군 부거(富居)로 치소를 옮겨 경원도호부로 부활시켰다가 6진 개척 당시인 1434년(세종 16)회질가(會叱家 : 지금의 경원읍)로 치소를 옮겼다. 이 때 지난날 공주에 속해 있었던 지금의 경흥군을 분리하여 공성현(孔城縣)을 두었다가 뒤에 경흥군으로 고쳤다.

1453년(단종 1) 함길도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의 뒤를 이은 이징옥(李澄玉)이 이곳에 머물러 있는 동안 계유정난으로 파면되자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칭하고 반기를 들었다가 종성에서 살해된 ‘이징옥의 난’이 있었고, 1583년(선조 16) 외적의 침입이 잦은 이 지방의 방어를 위하여 이순신(李舜臣)이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으로 부임하여 3년 동안 근무하였다. 1895년 지방관제가 개혁되어 부에서 군으로 되었다.

[근 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당시에는 훈융면(訓戎面)이 온성군에 편입되어 관하에 6개 면이 있었다. 근대에 활동한 인물로는 일찍이 노령 연추에 건너가 많은 애국지사를 도와 항일 투쟁을 하였고 상해(上海) 임시 정부의 재무총장에 선임되기도 한 최재형(崔在亨), 대종교(大倧敎) 3종사의 한 사람이며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재로 있다가 자결한 서일(徐一), 혼춘(琿春) 밀림 지대를 무대로 하여 신건원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한 뒤 붙잡혀 사형당한 김학섭(金學燮)·강병관(姜秉官)·강석훈(姜錫勳) 등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있다.

유물·유적

유물·유적으로는 경원읍성·한청정계비(韓淸定界碑)·용당(龍堂)·여진왕자비(女眞王子碑)·아산보(阿山堡)·안원보(安原堡)·건원보(乾元堡)·야랑성(也郎城)·현성(縣城)·거양성(巨陽城)·동림성(東林城)·고아산보(古阿山堡)·유신보(有信堡) 등과 20여 기의 고분군이 있다.

경원읍성은 1428년(세종 10) 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김종서가 축성하였으나, 그 뒤 1583년(선조 16) 여진의 침입으로 훼손되어 1603년과 1634년 높이 4.21m, 둘레 3,173m의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지금은 성터 일부만 남아 있다.

경원면 이도동의 한청정계비는 두만강의 유로 변경이 심한 범람원에 국경을 명확히 구분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동원면의 용당은 태조의 선조인 목조가 살던 곳이며, 지금도 당시의 성터·우물·비석 등이 남아 있다.

동원면 수정동에 있는 여진 글자로 비문이 새겨진 여진왕자비는 광복 전에 서울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졌으나 지금은 그 석단(石段)만 남아 있다.

아산면 신아산동의 아산보(높이 2.4m, 둘레 561m), 안농면 안원동의 안원보(높이 2.12m, 둘레 545m), 동원면 신건동의 건원보(높이 2.12m, 둘레 546m), 아산면 수정동의 고아산보 등이 있다.

경원면 동쪽 4㎞ 지점 만주 접경에 경원읍성과 같은 시대에 축성된 야랑성이 있고, 지금은 유지만 남아 있는 진북보에서 만주 쪽으로 현성지(縣城趾)로 추정되는 토성 터가 있으며, 이곳에서 북쪽으로 36㎞ 지점에 거양성이 있다. 동원면 중평동에는 1401년(태종 1) 도순무사 강사덕(姜思德)에 의하여 축성된 동림성(둘레 1,154m)이 있다.

교육·문화

옛날의 교육 기관으로는 경원면 성내동에 1437년(세종 19)에 창건된 경원향교와 지방 각지에 서당이 있어 많은 유생들이 교육을 받았으며, 신교육 기관으로는 1911년 경원공립보통학교가 처음 개교되었다.

곧 이어 용덕면에 향동사립학교가 개교하였고, 1914년 고건원공립보통학교, 1928년 아산공립보통학교의 설립으로 1면 1교의 교육 체제를 갖추었다.

1945년 현재 군내 교육 기관으로는 유치원 2개소, 초등학교 13개교가 있다. 종교 상황은 불교 사찰로 월명사·보현사·신흥사 등의 3개소가 있으며 개신교회는 장로교회 5개소가 있다.

이 고장 설화로는 이성계(李成桂)와 퉁투란(佟豆蘭)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성계가 공민왕 때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어 두만강 하류 지방에서 야인과 싸워 큰 공을 세웠는데, 그가 고조부 안사가 거처하던 옛터 용당에 머무르던 중 어느 날 대안의 여진 천호 퉁투란과 활쏘기를 겨루게 되었다.

두 장수는 용당 동림고성에서 강 건너편의 과녁을 맞히는 내기를 하였는데, 이성계는 백발백중이었고 퉁투란의 화살은 겨우 강심(江心)에 떨어지고 맡았다. 또,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재주를 겨루었으나 이성계를 따르지 못하였다.

이성계의 무예에 탄복한 퉁투란은 부하를 거느리고 귀화하여 북청(北靑)에서 살다가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와 이씨(李氏) 성을 받아 이지란(李之蘭)이라 개명하였고, 그 뒤 이성계가 등극하자 개국공신이 되었다.

이 밖에 오룡천 하구 수정리의 김노규(金魯奎)는 축지법을 써서 하루에 천 리를 가고, 쪽집개 같은 예언으로 앞일을 점쳐서 마을의 재난을 사전에 막았다고 한다.

민요로는 남한 각 도에서 이주한 후손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근세에 이르러서 새로운 문화권이 형성된 곳이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요는 발달하지 못하였고, 다만 〈애원성 哀願聲, 哀怨聲〉과 같은 근대요 몇 가지만 유행하고 있다.

경원의 〈애원성〉은 최북단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에서 생활상과 관련하여 생긴 민요로, 러시아나 간도로 살길을 찾아 떠난 남편을 그리는 여인의 노래가 대부분이며, 남한에서 살다 생활의 터전을 잃고 이 지방에 와서 유랑하는 사람들의 노래도 일부 발견된다.

이 점에서 단지 이별을 슬퍼하는 여인의 심정을 노래한 함경남도의 〈애원성〉과 구분된다. 따라서, 〈애원성〉은 익살스러운 내용은 거의 없고 비애를 주조로 한다. 이 고장 〈애원성〉의 사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세월아 네월아 네가 가지를 말어라 작난한 호걸이 다 늙어 간다.

(후렴) 에헤야 에헤야 아무리 보아도 널과 내로다 에헤야 에헤야

○삼천리강산 넓기는 하디만 널과 내 갈 곳이 그 어디란 말가

○강동 간 님은 돈이나 벌면 돌아오건만 북망산 간 님은 다시는 못 온다

○해삼위 항구가 그 얼매나 됴킬래 신개척이 찾아서 빈 보따리로다

○간다 간다 나는 돌아를 간다 간다해두 아주 갈가 정은 두고 간다

이 밖에 사설이 특이한 〈시집살이노래〉로서 “범이 그려 세다하니 세아비두고 더 세겠냐/고치장이 맵다더니 세어미두고 더 맵겠냐/어숭아꽃이 곱다하니 남편두고 더 곱겠냐”라고 읊은 것이 있다.

민속놀이에는 추석 때의 사자놀음이 있다. 사자 형상의 기구 속에 네 사람이 들어가 조작하면서 북과 징을 치며 마을을 누비고 즐긴다. 또, 청년층에서는 수시로 닭싸움놀이가 성행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보기 드물다.

또, 이 고장에서는 윷놀이가 성행하는데, 주로 정월에 하고 한랭한 곳이므로 실내에서 행한다. 윷가락은 나무 대신 주로 붉은 강남콩에 석 줄의 금을 새긴 것을 사용하며, 말 쓰는 방법은 다른 지방과 같다.

부녀자들은 ‘달맞이윷점’이라 하여 소반 위에 정화수를 떠 놓고 보름달을 향하여 절한 다음 윷을 세 번 굴려서 그 수에 따라 당년수책(當年數冊)이라는 점서를 찾아보고 그해의 신수를 점치는 풍습이 있다.

이 지방에서는 마을마다 산천제를 지낸다. 그 목적은 맹수나 괴질 따위의 재앙으로부터 마을과 주민을 구호하여 주기를 기원하기 위함이다. 대개 음력 3월 초순의 길일을 택하여 행하며 비용은 마을 사람 공동 부담이다.

모든 준비는 미리 선정한 여러 사람의 소임이 집행하며, 제수로 큰 돼지를 잡고 단술을 빚으며 시루떡을 장만하고 백미·백포 등을 마련하며, 그 밖에 각 집에서는 따로 메 진지 한 그릇씩을 지어 제단에 바친다.

제단은 큰 나무나 바위가 있는 정결한 곳을 택하여 임시로 설치하며 ‘산천지신위’라고 쓴 신주를 중앙에 모신다. 제물을 차려 놓고 초헌·아헌·종헌 등 제관 3인이 차례로 분향·헌작·배례하고 고축을 한 다음 모두 재배, 소지함으로써 의식은 끝난다. 행사를 마치면 그 자리에서 음복을 하며 삶은 제육을 꼬챙이에 꿰어 집집마다 고루 나누어 준다.

산업·교통

이 군은 평지보다 산지가 많아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활발하다. 논은 총 경지 면적의 11.3%에 불과하고, 88.7%가 밭이다. 1935년 현재 총농경지는 127.5㎢로 경지율은 16.2%이며, 그중 논이 14.4㎢, 밭이 113.1㎢이다.

경지의 대부분은 오룡천과 두만강 연안, 그리고 산록완사면과 곡저평야에 분포한다. 1925년경 도내 최대 규모인 몽리면적 2,200ha의 두만강수리조합이 설치되어 쌀 생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밭작물로는 콩·조·옥수수·피·감자 등이 생산된다.

특히, 양질의 목초가 많아 소·말·면양의 사육이 도내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지하자원은 용덕면의 고건원탄광(古乾原炭鑛), 안농면의 승량탄광(承良炭鑛), 경원면의 하면탄광(下面炭鑛) 등이 유명하다.

이 지역은 중국과 접하고 있는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예로부터 두만강을 중심으로 국경 무역이 활발하였다. 1406년(태종 6)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가 설치되었다.

1645년(인조 23) 회령의 ‘회시(會市)’와 경원의 ‘원시(源市)’가 개설되어 경원은 2년에 한 번씩, 회령은 매년 10월 이후에 장을 열었는데, 이를 호시(互市) 또는 쌍개시(雙開市)라 하였고, 총칭하여 북관개시(北關開市) 혹은 북도개시(北道開市)라 하였다. 개시기는 음력 4, 5월의 봄과 9, 10월의 가을 또는 12월이었으나 효종 이후로는 겨울에만 열었다.

청나라로부터의 수입품은 쌀·가죽·담뱃대·녹용·구리·부싯돌·말·노새·개·고양이 등이고, 수출품은 소·말·돼지·쌀·종이·가마니·호피·부엌 도구·농사 도구·소금·수산물·목재 등이었다.

청나라와의 교역은 다소 강제적이고 일방적인 측면이 있었으나 뒤에 시정되었으며, 근대에 와서 국제 철도의 부설로 수송 수단이 대형화됨에 따라 국경 무역의 관문 구실은 축소되었다.

군내에는 경원읍시와 고건원시장이 있으며, 주로 가축·곡류 등의 농산물과 신탄·일용 잡화 등이 매매된다. 철도와 국도는 두만강 연안의 평지를 따라, 북으로는 중국 동북 지방과 연결되는 온성군 남양(南陽)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기·나진과 연결된다.

읍·면

[경원면 慶源面]

군의 최북단에 있는 면. 면적 192.69㎢, 인구 1만 2391명(1945년 현재). 면소재지는 성내동이다. 이 면은 예로부터 회질가 또는 회포(檜浦)라고 불리던 곳으로, 북서쪽에는 증산·운무령·경관령 등이 솟아 급경사를 이루고, 그 지맥이 낮은 구릉이 되어 동으로 뻗어 내린 사이로 회천과 송천 등이 동류하여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며, 평야의 서쪽으로 북선선이 달리고 있다.

두만강 유역은 넓은 충적 평야로서 1925년경 인접 2개 면과 더불어 몽리면적 2,200ha에 달하는 도내 최대 규모의 두만강수리조합이 창립됨에 따라 북부의 곡창 지대가 되었다.

쌀 생산이 많고, 그 밖에 조·피·수수·콩 등의 잡곡이 생산된다. 면의 서부는 광대한 초원으로서 도립종마목장이 있어 말의 산지로 유명하며, 농가의 면양 사육 두수는 도내 제1위이고, 지하자원으로는 면의 북단에 하면탄광이 있어 갈탄 생산이 많다.

유적으로는 이도동에 한청정계비가 있으며, 경원읍성은 세종의 육진 개척 당시 김종서가 축조한 고성으로 지금은 성지의 일부만 남아 있다.

경원면에서 서쪽으로 약 16㎞ 지점에 있는 증산은 삼각형의 웅대하고 청수한 산이 하늘에 걸려 있는 것과 같으며, 산정에는 옛 봉화 터가 있어 국경 지방의 명산으로 알려져 있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교가 있다. 성내(城內)·회(檜)·관류(官柳)·봉운(峰雲)·하면(下面)·중영(中榮)·송천(松川)·이도(珥島)·증산(甑山)·심령(深嶺) 등 10개 동이 있다.

[동원면 東原面]

군의 중앙부에 있는 면. 면적 101.43㎢, 인구 5,226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신건동이다. 본래 동림·신건원의 2개 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동림의 동(東)자와 신건원의 원(原)자를 따서 지금의 동원면이 되었다.

면의 남쪽과 북쪽은 서부의 증산산맥에서 갈라진 낮은 구릉이 동으로 뻗어 내려 두만강변에 이르고 있다. 그중 북계의 구릉은 강변 부근에서 갑자기 융기되어 용당산(龍堂山, 253m)이 되었고, 강안에 이르러서는 깎아 세운 듯한 절벽 단애를 이루었다.

그 아래 강안은 북선선과 도로가 뚫려 있다. 면의 중앙은 안원천(安原川)이 동류하고, 남동부에는 오룡천의 하류 약 3㎞ 정도가 면내를 통하여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따라서, 이 면은 평야가 거의 없고 수리가 용이하지 않아 쌀 생산이 적으나 조·피·기장·수수·옥수수·콩 등의 잡곡 생산이 많고, 유축 농업이 발달하여 소·말·면양·돼지 등의 사육 두수가 많다.

면의 동북단에 있는 용당은 조선태조의 고조부인 이안사가 원나라에 망명 당시 거처하였던 유적지로서, 수목이 울창한 높은 대지에 동림고성의 옛 성터와 태종 때 세워져 500여 년 동안 나라의 행사인 하제(河祭)와 봄·가을로 제향을 받들었던 두만강사(豆滿江祠) 및 비각이 남아 있다.

이곳 아래에는 소련·중국 국경에서 흘러내린 여러 강류가 모인 두만강이 흐르며, 옛 알동(斡東)땅인 혼춘평야 너머로 소련 국경까지 볼 수 있는 명승지이기도 하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신건(新乾)·화정(禾汀)·노관(魯貫)·금월(金月)·공자(孔子)·유수(柳樹)·중평(中坪)·임대(林坮) 등 8개 동이 있다.

[아산면 阿山面]

군의 남동부에 있는 면. 면적 122.80㎢, 인구 6,795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신아산동이다. 이 면은 남서쪽 유덕·용덕 등 3개 면의 면계에 탑향산이 남북으로 뻗어 내려 서부 지역은 고지대를 이루었다.

면의 북단은 오룡천 하류가 통과하며 비옥한 농경지를 이루었고, 동부 두만강 연안은 좁은 평지를 북선선과 국경 도로가 달리고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대안의 혼춘현 남부의 좁은 지역을 지나 소련 연해주의 연추(煙秋)방면으로 통하는 지름길의 요충지가 되어 군사 교역상 중요한 위치에 있어 왔다.

농산물로는 쌀·조·피·보리·수수·옥수수·콩·강남콩 등이 많이 생산되며, 특히 콩은 알갱이가 크고 유분이 적은 우량종이며 제과나 간장의 원료로 도시에 반출된다.

면의 서부 지역에는 넓은 초지가 있고 잡곡 생산이 많으므로 유축 농업이 발달하여 소·말·면양·돼지 등 가축 사육 두수가 많다. 두만강변의 여름철은 연어·송어잡이가 성하며 강변야화(江邊夜火)는 이곳의 명물이다.

아산보는 조선 시대 초기의 축성으로 병마만호(兵馬萬戶)를 두었던 요진이었으나, 지금은 황폐하여 일부 성터만이 남아 있다.

오룡천 하구에서 약 4㎞ 떨어진 수정동 학음촌은 수목이 울창하고 돌담으로 둘러싸인 김해 김씨(金海金氏) 80여 가구의 동족 마을이며, 한말의 유학자인 김노규(金魯奎)의 향리로서 이름난 곳이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신아산(新阿山)·백안(白顔)·서산(西山)·아산(阿山)·송(松)·최치(最峙)·차(次)·장평(長坪)·백(柏)·하면(河面)·수정(水汀) 등 11개 동이 있다.

[안농면 安農面]

군의 북쪽에 있는 면. 면적 123.97㎢, 인구 1만 370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이동이다. 본래 안원면이었으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안민낙토(安民樂土)와 옛 지명 농포(農圃)의 첫 자를 따서 안농으로 고쳤다.

이 면의 북서부는 남으로 뻗은 증산산맥의 여맥이 낮은 구릉 지대를 이루고 있으나 중부의 이동은 비교적 평탄한 분지를 이루고 있다. 면의 중앙을 서에서 동으로 농포천이 흘러 두만강에 흘러 들어간다. 강 유역은 비옥한 충적 평야를 이루고 있고, 강변을 따라 북선선이 달리고 있다.

두만강 유역 일대는 1925년경 경원면과 더불어 두만강수리조합 구역내에 들어가서 쌀 생산이 많으며, 그 밖의 지역에서는 조·피·기장·수수·옥수수·콩·팥·강낭콩 등의 잡곡생산이 많다.

서부 지역은 넓은 초지에 도립 종마목장이 있어 말의 산지로 유명하며, 사료원이 풍부하므로 유축농가가 많고 소·말·면양·돼지 등의 사육 두수가 군내에서 1위이다.

지하자원으로는 승량동에 탄광이 개발되어 양질의 갈탄이 많이 생산된다. 두만강에는 여름철에 송어·연어·자라 등이 많이 잡혀 낚시꾼들이 모여든다.

면의 동남단 두만강연변의 용당역 부근에는 소다로의 영문(營門) 터가 남아 있다. 소다로는 1409년(태종 9) 두만강 하구 고성에 있던 경원부의 소재지를 잠깐 옮겼던 역사적 고지이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이(梨)·석현(石峴)·양(良)·금희(金熙)·신개(新開)·금(金)·상(上)·세(細)·고성(古城)·안원(安原)·승량(承良)·여운(如雲) 등 12개 동이 있다.

[용덕면 龍德面]

군의 중앙부에 있는 면. 면적 184.65㎢, 인구 1만 1176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용현동이다. 면의 서부에는 증산산맥이 가로놓여 있으며 7개의 석봉으로 된 나단산이 솟아 있고, 남부에는 아산과 유덕 등 3개 면 면계에 탑향산이 솟아 면내는 대체로 사면이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다.

하천으로는 회령·종성·경흥 등 배후지 계곡에서 모여들어 큰 내를 이룬 오룡천이 면의 중앙을 서에서 동으로 흘러 들어가며 충적 평야를 이루었다.

농산물은 오룡천 유역에서 쌀 생산이 많고 그 밖의 지역에서는 조·피·수수·기장·옥수수 등이 생산된다. 특히, 콩과 팥은 알갱이가 굵은 우량종이 많이 생산된다.

서부 지역에는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고 잡곡 생산에 의한 농후 사료원이 풍부하므로 일찍부터 유축 농업이 발달하여 소·말·면양·돼지 등 가축 사육 두수가 많다.

지하자원으로는 매장량 5000만 톤으로 추산되는 고건원탄광이 개발되어 양질의 갈탄이 대량으로 생산되며, 북선선의 신건원역과 광산 사이에 부설된 탄광 철도로 탄이 반출되며, 주로 아오지 인조 석유 공장의 원료탄으로 공급되었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용현(龍峴)·용북(龍北)·용서(龍西)·용문(龍門)·용평(龍坪)·용신(龍新)·용향(龍香)·용남(龍南) 등 8개 동이 있다.

[유덕면 有德面]

군의 최남단에 있는 면. 면적 131.44㎢, 인구 4,652명(194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지경동이다. 일명 ‘유신(有信)’이라고도 한다.

북쪽에는 용덕·아산 등 3개 면의 면계에 탑향산이 솟아 있고 서쪽에는 강팔령(江八嶺)이 가로놓여 있으며, 남쪽에는 경흥군과의 군계에 송진산이 솟아 그 여맥들이 서로 교차되며 남북으로 뻗어 내려 면내는 대체로 산악과 구릉이 중첩된 벽지이다. 하천으로는 지경천이 면의 중앙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있으나 수원이 짧다.

함경북도 6진 지방의 두만강 중류인 회령 방면과 하류 지방인 경흥군의 북부를 동서로 연결시키는 도로가 면내를 횡단하고 있어서 예로부터 육로의 요충지로 알려져 있다.

농산물로는 주로 조·피·기장·수수·옥수수·콩·팥·강낭콩·감자 등이 많이 생산되며, 특히 콩은 알갱이가 굵은 우량종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또한, 초지가 많고 농후사료가 풍부하여 유축 농업이 발달하여 소·말·면양 등의 사육 두수가 많으며, 근래 인접지인 아오지읍이 큰 도시로 발전됨에 따라 동부 지역에서는 야채의 공급지로서 배추·양배추·무·당근·우엉·가지·오이·수박·참외 등 각종 원예 작물의 재배 농가가 급격히 늘고 있다.

북쪽 탑향봉과 남쪽 송진산이 이어지는 산간 마을에는 장작·숯·약초가 생산되며, 특히 송진산 일대에서 산출되는 송이버섯은 계절적으로 이르고 향기와 풍미가 매우 뛰어나다. 교육 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지경(地境)·녹야(鹿野)·소랑(昭浪)·장안(莊安)·대(大)·학(鶴)·박상(朴上)·가현(加峴)·창평(倉坪)·용막(龍幕)·죽기(竹基)·고사(古寺) 등 12개 동이 있다.

광복 후 변천

1952년 12월 경원군 용덕면·안농면·동원면·경원면 전체와 아산면의 1개 이, 온성군 훈융면 중 3개 이가 통합하여 개편되었으며, 그때 이동리(지금의 농포리)가 군 소재지로 되었다.

1958년 6월 종성군에서 용계·봉산·종산·연산 등 4개 이가 경원군으로 편입되었고 경원읍은 농포리로, 봉우리는 경원읍으로 되었다. 1977년 9월경원군은 새별군으로 그 이름이 고쳐졌다.→새별군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
『택리지』(이중환)
『경원읍지(慶源邑誌)』
『함북대관』(김성덕 편, 정문사, 1991)
『함경북도지』(함경북도지편찬위원회, 1991)
『지방행정구역발전사』(내무부, 1979)
『북한교육기관 및 문화재현황』(국토통일원, 1985)
『북한행정구역 및 산천지세』(국토통일원, 1983)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재관리국, 1985)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15)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30)
집필자
조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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