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를 통한 정당통합운동에 실패한 이승만(李承晩)은, 새로운 민족통일기관의 설치구상과 단독정부 수립 준비 및 지지기반 확보를 위하여 1946년 6월 29일, 이 단체를 결성하였다.
1946년 6월 3일, 지방순회 도중 이승만은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언급하고, 서울로 돌아 온 즉시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설치할 것이라고 발표하였으며, 6월 10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11일 총재훈시를 통하여 21명의 각 도 대표에게 민족통일총본부를 설치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날 이승만은 민족통일총본부 발족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였고, 민족통일총본부의 부서 및 간부를 구성하였다.
총재에는 이승만, 부총재는 김구(金九), 협의원으로 이시영(李始榮) · 조성환(曺成煥) · 오하영(吳夏英) · 김성수(金性洙) · 이범석(李範奭) · 윤보선(尹潽善) · 김동원(金東元) · 허정(許政) · 방응모(方應謨) · 이묘묵(李卯默) · 김순애(金淳愛) · 노마리아(盧馬利亞) 등이었다.
그리고 정경부(政經部)에 김병로(金炳魯) · 김상덕(金尙德) · 이윤영(李允榮), 노농부(勞農部)에 고창일(高昌一) · 장자일(張子一) · 전진한(錢鎭漢), 선전부에 홍성하(洪性夏) · 장석영(張錫英) · 김선량(金善亮), 청년부에 김철수(金喆壽) · 김효석(金孝錫) · 김산(金山) · 박용만(朴容萬), 부녀부에 박현숙(朴賢淑) · 박승호(朴承浩) · 임영신(任永信) · 황신덕(黃信德) 등이었다.
민족통일총본부는 그 선언문에 명시한 것처럼 민주의원이나 비상국민회의와는 별도로 이승만과 김구의 주도에 의하여 민족주의진영의 국민운동기관으로 새로이 설치된 것이었다.
그러나, 좌익계는 물론 우익 일부에서조차 이승만의 이러한 행동은 민족을 분열시키는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하였고, 김규식(金奎植)과 여운형(呂運亨)은 민족통일총본부와 관계 없이 계속해서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민족통일총본부는 출발에서부터 그 명칭과 명분에 상응하는 조직을 갖추지도 못하였고, 지지도 얻지 못한 유명무실한 단체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