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건연대는 미상이다. 조선시대 태종이 어린 시절에 글을 읽었던 사찰로서 당시에는 띳집 두어 칸이 숲속에 황폐하게 있었으며, 승려 석휴(釋休)가 태종을 보살폈다고 한다. 태종이 즉위한 뒤 석휴는 가끔 궁중에 드나들었고, 태종은 이 절을 각별히 돌보았다.
1410년(태종 10) 12월에는 석초(釋超)를 주지로 임명하고 향을 하사하였으며, 1412년 10월에는 원주목사 및 승정원에 이 절의 승려들이 전세(田稅)를 많이 거두어들인 일을 문책하지 말 것과 이 절의 중수를 도울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다시 승정원에 명하여 중관(中官)을 보내어서 현훈폐(玄纁幣 : 검은 것과 붉은 것의 두가지 폐백) 1필을 불전에 바치고, 승려들에게는 면포와 주포 10필, 마포 50필, 저화(楮貨) 200장을 내려주게 하였다. 그 뒤 1416년 4월부터 중창하였는데, 이 때에도 태종은 철 1,000근과 중수에 필요한 재목 1,000주를 내렸으며, 충청도 제천 창고의 쌀과 콩 100석을 하사하였다.
1417년 3월에는 태종이 행행(幸行)하였으며, 그 해 9월에는 낙성법회를 열자 태종은 옥천부원군유창(劉敞)에게 향과 소(疏)를 주어서 대신 참석하도록 하고 《화엄경》을 보내어 봉안하도록 하였다. 이 경은 태종이 황고(皇考)와 황비(皇妃)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절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중건을 보지 못하였다. 각림사 곁에 태종대(太宗臺)가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각림사에 대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