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금천(衿川).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로,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이다.
병자호란 후 1637년(인조 15)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에 볼모로 갔다가 1644년에 돌아왔다.
다음 해 세자가 인조의 미움을 받다가 죽자 시강원 제신들의 조문도 받지 못하고, 세자의 장지와 장일 문제에도 관여하지 못하였다. 세자가 죽으면 마땅히 세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인조는 이를 무시하고 차자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다음 왕위 계승자로 삼았다.
이러한 배경에는 평소 사이가 나쁘면서 인조의 총애를 받는 소의조씨(昭儀趙氏)의 모함이 크게 작용하였다. 얼마 뒤 조씨의 조작으로 궁중에서 조씨에 대한 저주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되었다.
또한, 1646년에는 임금의 수라상에 독을 넣은 사건이 일어나자 그 소행의 장본인으로 모함을 받아 시비도 가리기 전에 후원별당(後苑別堂)에 감금되고 말았다. 측근에 있었던 궁녀들이 불복하면서 무참한 죽음을 당하고, 조신들도 일제히 일어나 통렬히 그 불가함을 역설했으나, 끝내 사사되고 말았다.
이어 후환을 막기 위해 친정어머니마저 처형되고, 세 아들은 제주에 유배된 뒤 그 중 이석철(李石鐵) · 이석린(李石麟) 형제는 의혹 속에 죽고 말았다. 효종 때 황해도관찰사 김홍욱(金弘郁)이 소를 올려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사실이 옳게 밝혀지면 종통소재(宗統所在)가 남은 아들 이석견에게 돌아가게 되므로 효종은 이를 묵살하고 오히려 김홍욱을 죄인으로 몰아 장살(杖殺)하였다. 1718년(숙종 44)에 이르러서야 복위되고 김홍욱도 정경(正卿)으로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