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인수(仁叟). 강효정(姜孝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세응(姜世應)이고, 아버지는 진사 강숙(姜璹)이며, 어머니는 성수근(成守瑾)의 딸이다. 작은아버지인 진사 강서(姜瑞)에 입양되었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80년(선조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 · 전적을 거쳐 예조 · 병조의 좌랑과 정랑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과 평양이 차례로 함락되자 경기도관찰사 심대(沈岱)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였다.
강수남은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서 군사에 관하여 배운 일이 없었지만, 오로지 충의의 마음으로써 국가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출전하기에 앞서 가족들을 불러놓고 이별을 고하고 죽은 뒤에 시체라도 찾게 하고자 붉은 실을 머리에 얽어매고 옷소매에는 이름을 기록하였다.
그해 10월 군사를 움직여 한성을 탈환하려던 중 삭녕전투에서 야습을 받아 군사가 흩어졌으나 가노(家奴) 검산(檢山)과 끝까지 싸우다 함께 죽었다. 출전할 때 신표로 상투에 묶었던 붉은 실을 보고 겨우 머리만을 수습하여 장사지냈다.
뒤에 검산의 자손도 복호(復戶)되었고 선조가 제관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이조참판을 추증하였다가 다시 이조판서를 가증(加贈)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