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계승(季昇), 호는 전암(典庵). 칠원(漆原: 지금의 함안군 칠원읍) 무기리 출신. 아버지는 장릉참봉(章陵參奉) 강주제(姜柱齊)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로 최진망(崔震望)의 딸이다.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으로서 17, 18세에 문예(文藝)가 성취되었고, 식견이 해박하였으며, 스승이 ‘심시(尋是)’라는 두 글자를 써주고 격려하였다. 성리학에 밝아 이에 대한 저술이 여러 편 있으며, 이직보(李直輔) · 김이안(金履安) 등과 학문을 토론했다.
한편, 향시에 응시하였을 때 시권(試券: 과거응시자들이 제출한 답안지)을 보고 “이같이 훌륭한 문장이 빛을 보지 못한 것은 유사(有司)의 과실이다.”라 하고, 특별히 수선(首選)에 올려놓았다. 또, 응제(應製: 임금의 명령으로 시문을 짓는 일 또는 임금의 특명에 따른 임시 과거) 때 정조가 그의 문사(文詞)를 칭찬하고 붉은 보자기로 시권을 싸서 집에 소장하게 하였다.
정조가 영남 선비 중 문장에 능한 자를 선발하여 규장각 강의(講義)를 교정하라는 영(令)을 내리자, 도신(道臣)이 그를 추천하였다. 이 일을 마치자 왕은 쌀과 종이 및 붓을 상으로 주었다.
그는 『심경(心經)』 · 『근사록(近思錄)』 · 『주자대전(朱子大全)』 등을 강론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이황(李滉)의 「천명도(天命圖)」를 토대로 「심성도(心性圖)」와 「대학강령도(大學綱領圖)」 등 고금의 성리설에 관한 많은 도식과 차록(箚錄)을 만들어 성리학에도 이바지하였다. 저서로는 『전암문집(典庵文集)』 8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