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의 단층 팔작기와지붕 건물이다. 근정전(勤政殿) 뒤 사정문(思政門) 안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로, 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면서 정사를 보살피던 전당이다.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세종 때에는 이미 편전으로 이용되었다.
조선 초기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현재의 건물은 1867년(고종 4)에 중건된 것이다.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이를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왕으로 하여금 깊이 생각할 것을 촉구한다는 뜻으로 ‘사정전(思政殿)’이라 하였다.
1435년(세종 17)에 세종은 이곳에 거처하면서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를 짓게 하고 이를 이름하여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라 명하였다. 세조 때에는 사정전 앞 낭무(廊廡 : 정전 아래로 동서에 붙이어 지은 건물)에 큰 종을 달고 군정(軍政)을 보살필 때면 엄히 다스린다는 호령으로 이 종을 쳤다.
동쪽에 만춘전(萬春殿), 서쪽에 천추전(千秋殿)이 있어 세 건물이 편전 일곽을 형성하고 있다. 한 벌의 디딤돌 위에 세 개의 계단이 마련된 장대석 축대를 쌓고 둥근 초석을 놓았다.
사면 둥근 기둥 사이에는 흙벽을 치지 않고 사분(四分)의 광창(光窓)과 문틀〔門扉〕만으로 짜여졌고, 그 위에는 빗살무늬의 교창(交窓)이 있어 집 속을 밝게 하였다. 기둥 윗몸에는 창방과 평방을 짜돌리고 내외이출목(內外二出目)의 공포를 놓았다.
내부는 대들보 위를 우물천장으로 가렸고, 처마는 겹처마이며 각 등성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鷲頭 : 매머리모양의 장식) · 용두(龍頭) · 잡상(雜像)을 각각 배열하였다.
양식상으로는 별다른 특징이 없으나,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편전이 모두 정전의 측면에 있는 것과 달리 이 건물은 정전의 정북방에 위치하고 있어, 경복궁이 조선조의 정궁(正宮)으로서 질서정연한 배치원칙을 따르고 있음을 이 건물의 위치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건물은 국왕이 정무를 수행하던 편전으로, 정전인 근정전과 더불어 치조의 중요한 공간이었다. 1867년(고종 4) 중건한 이후에 그 외관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공포짜임을 비롯한 구조 양식 전반과 기능 충족을 위한 공간 구성 등의 면모를 비교적 잘 간직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건축적으로 그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